2부 두 권의 책
강의 노트
병원을 옮기면서 모든 상황이 좋아졌다. 석사 학위를 받은 후에 여기저기서 문학과 의학을 주제로 특강 요청이 들어왔고, 비록 여덟 시간짜리 교양과목이었지만 의과대학에서 정기적으로 강의도 맡게 됐다. 강의료가 두둑한 것도 아니고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도 아니었지만 평생 문청으로 책 읽고 글이나 끄적거리면서 지내다가 끝나는 것보다는 훨씬 의미 있는 진전처럼 보였다.
의사로서도 좋아졌다. 아무리 응급의학과가 응급처치에 대한 전문가라고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꼈던 것이 사실이다. 응급의학과 전문의가 된 지 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종종 자괴감이 들었던 것은 수련기간 동안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후에 무얼 배워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평생 아무것도 더 나아질 것 같지 않을 것 같아 불안했다.
하지만 화상센터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 그동안 고민했던 문제들이 해결됐다. 전문성을 갖추면서 응급의학과 수련과 연속성을 유지하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었다. 응급실과 중환자실에 입원한 중증 환자도 보고, 외래의 경증 환자도 보면서 수술도 할 수 있는 전천후 의사를 꿈꿨는데 점점 그 꿈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떤 일들은 실제로 일어났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무엇을 믿는냐에 따라서 달라질 뿐이다. 한때는 진짜 모든 것이 좋아졌다고, 그래서 행복해졌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석사 학위를 받았고, 특강을 해달라는 연락을 받았고, 중증 화상환자들이 중환자실에서 일반병실을 거쳐 퇴원하면서 덕분에 살아서 나가게 됐다는 감사 인사를 했다. 이 모든 일들은 일어났다. 하지만 당시에 나는 진짜로 행복했던가.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기는 내 인생에서 가장 위태로웠던 시기였다. 이상하게도 두 개의 세계에서 바라던 그 모든 일들이 실제로 일어났음에도, 대부분 실현됐음에도 여전히 불안했고 여전히 행복하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에는 행복하다고 믿었다.
1982년 국영라디오 방송에서 나르시소 예페스와 인터뷰를 했다. 진행자는 예페스에게 어떻게 해서 일곱 살 때 작자 미상의 곡 로망스를 자신이 작곡했다고 믿게 됐는지 물었다. 예페스는 1934년 11월 14일 자신의 일곱 살 생일날 어머니를 위해서 새로운 곡을 작곡해서 연주하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 순간 영감처럼 멜로디가 떠올라 곡을 쓰기도 전에 연주하고 그걸 악보에 옮겨 적었다고 했다. 안타깝게도 그 당시에 적었던 친필 악보는 사라졌다.
연주를 들은 어머니는 기뻐했고, 스승에게 들려줬을 때도 너무 훌륭하다는 칭찬을 들었다. 자신감이 붙은 예페스는 친구들과 다른 가족들 앞에서도 연주했는데 모두 칭찬 일색이었다. 칠 년 정도가 지나서 발렌시아에 왔더니 수많은 기타 연주자들이 자신이 작곡한 곡을 연주하고 있는 게 아닌가. 예페스는 1952년 르네 클레망으로부터 <금지된 장난>의 음악을 부탁받았을 때 서른 번 넘게 영화를 보고 나서 어린 소년과 소녀의 사랑에 딱 맞는 음악을 생각하다가 자신이 어머니를 사랑해서 작곡했던(그렇게 믿었던) 곡을 떠올렸다고 한다. 놀라운 일이지만 호세 자크(Jose Jarque)가 로망스가 작자 미상의 곡이라는 얘길 해주긴 전까지 자신이 작곡했다는 사실을 굳게 믿었다.
어떤 믿음은 너무 강력해서 백일몽마저 실재(實在)로 둔갑시킨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