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두권의 책
강의 노트
우주의 동생인 누리는 군의관이 끝나가던 그해 가을에 태어났다. 금병산을 화려하게 물들였던 단풍처럼, 행복한 시절의 방점처럼 기쁘고 소중했던 시절이었다. 그 후로 몇 년의 시간이 지나 누리는 명랑하고 애교 많은 소년이 됐다. 지금도 깔깔대며 웃던 시절의 누리를 떠올려 보곤 한다. 그 시기에 누리는 어디로 튈지 모르기 때문에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아찔했던 순간도 있었다. 누리가 다섯 살 정도였을 무렵 부산으로 여름휴가를 간 적이 있었다. 다른 가족들과 함께 송정해수욕장에 갔는데 한창 휴가철이어서 백사장이 피서객들로 빽빽했다. 우리는 해변에서 좀 먼 쪽에 자리를 잡았고 누리는 바다에 가까운 백사장에서 모래놀이를 했다.
나와 누리 사이에는 두 개의 파라솔이 시야를 부분적으로 가리고 있었는데 그 사이로 누군가 지나가면서 시야가 십 초 정도 완전히 가려졌다. 그리고 누리가 사라졌다. 아무리 둘러봐도 없었다. 나와 아내를 포함해서 같이 온 모든 사람이 흩어져 인파 속에서 누리의 이름을 부르고, 미아 신고를 하러 가고 난리법석을 떤 후에야 겨우 찾았다. 아마 십오 분도 채 안 됐을 그 시간이 내겐 마치 열다섯 시간처럼 느껴졌다.
누리가 걱정스러웠다. 걷거나 서는 것도 늦었고 대소변을 가리는 것도, 말을 배우는 것도 늦었다. 체육클럽을 다니면서 알게 됐는데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는 데는 훨씬 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단체 운동이 아예 불가능했다. 다른 아이들이 운동을 하고 있으면 항상 구석에서 혼자 딴짓을 했다. 처음에는 운동을 싫어하기 때문이거나 일시적인 것이려니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정도가 심했고 결국 클럽을 그만뒀다. 이후에도 비슷한 일들이 반복됐다.
초등학교 1학년 1학기가 끝날 무렵에 아내가 담임 선생님과 면담을 했다. 누리 때문에 수업을 진행하기 어렵다고 했다. 며칠 후에 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다. 검사 결과가 나오던 날 오후에 아내가 전화를 했다. 병원 근처 사거리에서 신호대기로 정지해 있던 앞차를 받은 것이다. 잠깐 딴 생각을 했다고 했다. “ADHD래. 약을 먹어야 할 것 같아.” 아내가 피곤하고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약을 먹기 시작하면서 누리는 조용해졌다. 정확히 말하면, 약이 효과를 발휘하는 동안은 조용했지만 약효가 떨어지면 소파 위를 뛰어다니고 애교 많은 예전의 누리가 됐다. 주치의에게 어느 쪽이 진짜 누리냐고 물었더니, 전혀 망설이지 않고 조용한 누리라고 대답했다. 믿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애교 많고 깔깔대던 누리는 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기억하지 못하는 어딘가에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누리를 잠깐 잃어버린 거라고, 하지만 곧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송정 해수욕장에서 그랬듯이.
잘못은 나와 상관없이 일어난다. 맞는 말이다. 만약 누리의 병이 내 인생에 생긴 어떤 ‘잘못’이라면 그렇다는 얘기다. 나는 열심히 살았다. 응급의학과 의사로서 전문성을 갖추기 위해서 병원을 옮겼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수술을 배우고 중환자실 환자를 돌보며 일주일을 보냈다. 주중에 한 번씩 응급실 당직을 섰고 주말에도 나와서 근무를 했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남는 시간에는 강의를 준비했다. 강의계획서를 만들고, 수업교재를 읽고 강의노트를 쓰고, 학생들의 글에 대한 코멘트를 달았다.
병원에서는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고 강단에서는 문학을 논하는 의사라, 얼마나 우아하고 근사한 일인가. 하지만 실상은 보이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나는 병원 일도 강의도 간신히 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외래를 보면서 강의 노트를 작성하다 보니 환자에게 소홀해졌고 중증화상환자라도 몇 명 생기면 강의 준비를 할 시간이 없으니 수업에 소홀해졌다. 시간이 갈수 문학 강의가 점점 더 부담스러웠다. 어정쩡한 상태로 유지되던 두 개의 세계는 상처만 남기며 점점 비비 꼬여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부모로서의 ‘나’였다. 내겐 시간의 여유 뿐만 아니라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아내 은수도 마찬가지였다. 출근을 하고, 집안일을 하고, 누리와 함께 병원을 다니랴 언어치료와 놀이치료를 다니랴 쉴 시간이 없었다. 초등학생인 우주는 점점 더 통제가 불가능해지고 있었다. 학교와 학원 숙제는 대부분 하지 않았고, 친구들과 하루 종일 쏘다니다가 저녁 늦게 들어오기 일쑤였다.
한때 미국에서는 자폐스펙트럼 장애가, 당시에는 이런 병명으로 불리지 않았지만, 냉담한 엄마 때문에 생긴다는 가설이 지배적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아이에게 냉담한 엄마가 자폐성향을 만드는 중요한 원인이라는 것이다. 언론에서는 ‘냉장고 엄마’라고 불렀다. 그 시절의 나는 냉장고 아빠였다. 항상 일에 찌들어 있는 아들에게 무관심한 아빠.
병원을 옮기고 나서 4년 정도가 지났을 때 군의관 동기인 준석을 만났다. 원래 ‘밀덕’이었던 그는 워낙에 다방면에 관심이 많았는데, 전역을 한 후에는 최면술 자격증도 따고 신학대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목사님 되시려고?”
“꼭 그런 건 아니야. 원래는 정신적으로 의지할 데가 필요해서 교회를 다녔는데 그냥 일요일만 나가는 걸로는 성에 안 차서. 아예 본격적으로 공부를 해보기로 한 거지.”
“정신의학과 의사이자 목사로서 조언 좀 해봐.”
준석이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의사로서 할 말은 약 먹어, 목사로서는 음, 회개해.” 준석이 치킨 한 조각을 포크로 집었다.
“사도 요한이 광야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고 외치잖아. 거기서 회개하라의 유대어 의미는 생각을 바꾸라는 거야. 더 어렵게 얘기해줄까? 우리를 괴롭히는 건 사물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우리의 판단이라니까.”
“결국 ‘나’를 바꾸라는 거네.”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지.”
우리는 군의관 시절로 다시 돌아갔고 유격훈련 때 벌어졌던 전쟁 해프닝과 헬기 후송을 안주 삼으며 즐거워했다.
“근데 그 새끼 깜빵 안 가고 영창 갔다가 결국 의병 전역했더라. 대체 어떻게 손을 썼는지 심신미약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소견서를 구구절절 써 보냈는데도 의무사 윗대가리들이 그렇게 처리했더라구. ”
누굴 얘기하는지 몰라서 준석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네가 후송 따라간 그 환자 벽돌로 찍고 불 지른 놈.”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