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두 권의 책
포스팅
2012년 10월 22일 태풍 샌디가 미국에 상륙했다. 우리가 막 도착해서 짐을 푼 롱아일랜드 지역에 샌디가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닷새 후였다. 오전에 부동산 중개인은 전화로 태풍에 대비하는 요령에 대해서 꼼꼼하게 알려줬다. 태풍이 지나가면 다시 들르겠다고 덧붙였다.
우리 가족은 거실에 모여서 자기로 했다. 이불이 없어서 무릎 담요 여러 장을 바느질로 얼기설기 연결한 이불과 혹시나 해서 가져온 침낭을 덮고 거실 유리창에서 가장 먼 곳에 모여서 잠이 들었다. 그날 밤 평생 들어 본 적이 없었던, 그리고 앞으로도 들을 일이 없을 것 같은 끔찍한 바람 소리를 들었다.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바람이 공기를 가르고, 나뭇가지가 우두둑 꺾였다. 거리에 버려진 깡통이 어딘가로 세게 부딪쳐 요란한 소리를 내며 아스팔트 위를 굴러갔다. 알 수 없는 물건들이 날아가다가 어딘가에 부딪혀 떨어지는 소리도 들렸다. 멀리서 유리가 와장창 깨졌다. 우리 집 유리창이 아닌 게 천만다행이었다. 밤새 내내 무언가 깨져 버릴 것처럼 집안이 흔들리고 덜컹거렸다.
무섭고도 소란스러웠던 밤이 지나고 거짓말처럼 아침이 왔다. 집 밖으로 나왔더니 주변의 풍경은 말 그대로 풍비박산이었다. 천년만년 그 자리에 뿌리내리고 있을 것만 같았던 아름드리 나무들이 여기저기에서 폭격을 맞은 마을의 부상병처럼 쓰러져 있었다. 잔디밭의 나무는 뿌리째 통째로 뽑혀 있었고. 도로변에 심겨 있던 커다란 나무는 담장을 무너뜨리고 마당으로 쓰러져 있었다. 시뻘겋게 물든 잎이 나무줄기에 맺힌 붉은 핏방울처럼 가지 위에서 덜렁거렸다. 땅에 떨어진 새빨간 단풍잎들이 어지럽게 마당을 굴러다녔다.
위층에 살고 있는 노인이 태풍이 휩쓸고 간 거리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던 내게 말했다. 흑백 투톤의 체크무늬의 트위드 자켓과 밝은 회색의 슬랙스를 입은 백발의 여자가 햇살 때문에 유난히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저렇게 큰 나무가 쓰러졌는데 나 같은 노인이 이렇게 멀쩡히 서 있다니. 너무 놀랍죠?”
2012년 가을부터 이듬해 가을에 한국으로 돌아올 때까지 포트제퍼슨 병원에서 일 년 연수를 받기 위해 멜빌에서 지냈다. 자운대 시절을 떠올릴 때면 게 두 아들이 태어났던 병원과 계절 따라 변하던 금병산이 생각나는 것처럼 이 시기를 떠올릴 때면 태풍 샌디가 휩쓸고 난 후에 보았던 집 밖의 풍경이 생각나곤 한다. 태풍, 뿌리째 뽑힌 거대한 나무, 핏빛처럼 붉은 나뭇잎, 덧붙여 셰익스피어 작품에 등장하는 마녀의 예언과도 같은 윗집 할머니의 한마디. 당시에는 일 년짜리 연수 생활에 대한 불길한 전조처럼 느껴졌는데, 지금은 나와 우리 가족의 여정에 대한 에피파니를 경험한 것 같은 느낌이다.
신춘문예에 소설로 등단까지 했던 박한수는 정신의학과 의사가 된 후에는 소설을, 아니 문학을 거의 읽지도 쓰지도 않는다고 했다. 어렸을 땐 울퉁불퉁한 성격이어서 불만도 많고 분노도 많았지만 정신과 의사가 된 후로는 둥글둥글한 성격이 됐기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 당시에는 이해가 안됐는데 지금은 조금 이해가 된다. 행복한 사람들은 글을 쓰지 않는다. 그게 아마도 미국에서 일 년 동안 내가 글을 쓰지도 책을 읽지도 않았던 이유일 것이다.
그 시기에 유일하게 규칙적으로 썼던 건 카카오스토리에 올렸던 우주의 야구 경기에 대한 포스팅이었다. 우주가 속했던 팀이, 그러니까 내셔널스, 호크스, 마린스가 어떤 팀을 만나서 어떻게 점수를 내고 주었는지와 우주의 활약상에 대해서 기록했다. 우주가 속한 세 개의 팀은 두 번의 우승과 한 번의 세미파이널 진출을 기록했다.
누리의 생활은 한국에서와 비슷했다. 학교에서는 약 때문에 지나치게 조용했고 약 기운이 사라질 때면 집에서 깔깔대면서 거실을 뛰어다녔다. 매일 <스폰지밥>을 보았고 연필로 그림을 그렸고 가끔 자신이 만든 이야기를 들려 주기도 했다. 밤을 영원히 만들려는 괴물들(뱀파이어, 미이라, 늑대인간, 늪지 괴물, 유령, 좀비 드라이버, 좀비 신부, 좀비 신랑)과 그것을 막으려는 몬스터 파이터즈가 등장했다. <스폰지밥>에 그렇게 많은 괴물이 나오는지 조금 의아했다. 저 많은 괴물들을 어디서 본 걸까.
그때까지도 나는 누리의 내면에는 평범한 아이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약을 먹고 꾸준히 치료를 받다 보면 어느 순간 그 ‘평범한’ 아이가 튀어나와 약을 먹지 않고도 학교를 다니고 친구를 만들 거라고, 약을 먹어야 하는 어두운 밤과 같은 시간을 언젠가는 몬스터 파이터즈가 끝장내 줄 거라고 믿었다.
멜빌을 떠나던 날 JFK 공항으로 가기 위해 콜택시를 탔다. 흰색 미니밴 '오딧세이'였다.
“미국에도 단풍나무가 참 많네요.”
내가 차창 밖으로 보이는 새빨갛게 물든 나무를 가리켰다.
“저거 단풍나무 아니에요. 챔피언 나무예요.”
운전사(한국 콜택시를 이용했다)가 말했다. 차가 신호대기를 위해 멈췄다. 자세히 보니 한국의 단풍나무보다 훨씬 크고 우람해 보였다.
“영어로 레드 오크라고 하는데 한국 사람들은 손기정 선수가 금메달 받을 때 저 묘목을 받아서 챔피언 참나무라고 불러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