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두 번째 책
에필로그
우주가 야구를 그만두겠다는 선언을 한 이후로 일 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퍼펙트 게임>을 썼다. 야구가 가족을 위기에서 구하고 아들은 프로야구 선수가 된다, 가 원래 스토리라인이었지만 이미 글을 쓰던 초기에 불가능해졌다. 프로야구 선수가 될 수 없으니 말이다. 더 이상 쓰는 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여름리그까지 쓴 상황이어서 그만두기엔 아까웠다. 결국 계속 쓰기로 했지만 여전히 어떻게 끝낼 것인지는 나 자신도 몰랐다. 야구가 가족을 위기에서 구하고 또다시 야구공이 아빠를 위기에서 구했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결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냥 쓰다 보면 언젠가 끝날 거라고 생각하면서 야구했던 날들을 떠올렸다. 행복한 날에 대해서 쓰는 건 행복을 기록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불행을 견디기 위해서일 가능성이 많다. <퍼펙트 게임>은 점점 야구 경기를 기록하는 것에서 사춘기의 폭풍을 견디는 가족의 이야기가 돼 가고 있었다.
“이거 어떻게 저장해요?”
<퍼펙트 게임>이 어느 정도 마무리 돼 에필로그를 쓰던 무렵이었는데 누리가 거실 모니터에 시선을 둔 채 물었다. 당시 누리는 초등 5학년이었고, 거실에 있는 컴퓨터 앞에 앉아서 마우스를 이용해 뭔가를 그리는 중이었다. 거의 두 달 가까이 에어컨도 틀어놓지 않은 거실 컴퓨터 앞에서 매일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앉아 있었다.
누리에게 저장하는 법을 가르쳐주다가 저장된 그림들을 보게 됐다. 누리가 그림 속 세상에는 밤마다 알록달록한 유령들이 붉은 등을 길잡이 삼아 어두컴컴한 거리를 둥둥 떠다니고, 얼굴이 부서진 안드로이드가 성큼성큼 다가와 친구가 되고, 기괴한 형태의 괴물들이 개와 고양이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동네 여기저기서 출몰했다.
부서진 안드로이드, 붉은 등(燈)이 떠다니는 어두컴컴한 밤을 배회하는 알록달록한 유령들,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에 등장할 것 같은 그로테스크한 모습의 괴물. 모두 놀라웠지만 그림에서 풍기는 묘한 귀기(鬼氣) 때문에 불안했다.
중학생이 된 후로는 누리는 그림을 보여주지 않았다. 어쩌다 본 것이라곤 시험지 귀퉁이에 연필로 꼬물꼬물 그린 괴물들이 전부였다. 국사와 국어 시험지에는 상대적으로 많은 괴물이 살았고 영어와 수학 시험지에는 적었는데, 괴물의 수는 과목점수와 반비례했다. 심지어 국사 시험지에는 너무나도 많은 괴물이 그려져 있어서 실컷 그리다가 남는 시간에 문제를 푼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기도 했다.
누리는 애니큐브라는 학원을 다녔다. 수업을 세 번 받고 나서 학원에서 은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원장이 보낸 것이었다. 몇 개의 숫자들과 면담이라는 단어밖에 없었지만 조금 불길했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서 보니 원장님이 앉아 있는 책상 옆에 커다란 종이 봉투가 있었다.
“누리 학생 말입니다. 음, 어렵겠어요.”
원장이 입술을 꾹 다물고 잠시 딴 곳을 응시했다.
“네. 너무 늦게 시작한 건 알지만 아이가 꼭 하고 싶어 해서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손버릇이 안 좋아요. 다른 선생님들과 아이들이 모두 무서워해요.”
“누리가 뭘 훔쳤나요?” 은수가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원장이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누리가 고집이 세고 답답한 성격이긴 하지만 다른 사람 물건에 손을 대거나 그럴 만한 일을 할 아이는 아니었다. 누굴 때리거나 그랬다면 아마도 무슨 오해가 있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런 일이라면 이렇게 뜸을 들이지는 않을 텐데.
“선생님의 지도를 거부하는 학생은 가르칠 수 없습니다. 그림에 손을 대려고만 하면 손을 붙잡고 못 하게 해서 여선생님들이 누리를 너무 무서워합니다. 학생들도 그렇구요.”
은수는 대충 어떤 상황인지 짐작이 갔다.
“누리가 고집이 세고 사교성이 부족해요. 알아듣게 잘 얘기하겠습니다. 다신 안 그럴 거예요.”
원장이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문 쪽으로 걸어갔다. 은수는 면담이 끝나서 나가는 거려니 생각하고 따라서 일어나려고 했다.
“저거 가지고 가세요.”
원장이 책상 옆에 놓여 있던 커다란 종이백을 가리켰다.
“이게 뭔가요?”
“누리 물건입니다. 오늘 가져가세요.”
은수는 학생을 딱 세 번 보고 가르칠 수 없다고 하는 것도 괘씸하고, 미리 짐을 다 싸놓은 것도 불쾌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딱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시면 안 될까요? 다시는 그런 일 없도록 할게요.”
“안 됩니다. 나머지 학원비는 이체해 드리겠습니다.”
아내는 원장에게 거의 등을 떠밀리다시피 해서 나왔다. 당장 다닐 학원이 없는 것도 문제였지만 누리가 받게 될 충격을 생각하니 앞이 캄캄했다.
“혹시 이 근처에 다닐 만한 학원이 없을까요?”
체면이고 자존심이고 모두 버리고 애원하듯이 물었다. 쫓겨나는 마당에 다른 애니학원을 소개시켜 달라고 하는 상황이 우스웠지만 당시에는 그런 걸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원장이 잠깐 생각하더니 안 됐다는 표정을 지으며 마지못해 대답했다.
“여기서 조금 걸어가시면 보가스 학원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거기 가 보세요.”
그날 들고 온 종이백 속에는 그림 하나가 들어있었다. 어렸을 적 그린 그림 같았다. 단검을 든 남자가 몇 겹으로 포개진 괴물들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었다. 바로 앞에는 사마귀처럼 생긴 괴물이 시뻘건 눈을 부릅뜬 채로 입을 쩍 벌리고 있었고, 남자의 머리 위로는 조커처럼 입꼬리가 위로 길게 찢어진, 방패연처럼 네모난 괴물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멀리 거대한 잠자리 모양의 또 다른 괴물이 핏발이 선 눈을 부릅뜨고 있었고, 붉은 발톱과 가시로 덮인 녹색 다리가 거미줄처럼 드리워져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차원의 장막에 숨어있는 괴물들을 물리치고 필사적으로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는 존 신부를 떠올렸다. 물론 누리가 내가 20년도 더 전에 창조했던 존 신부 따위를 알 리 없었겠지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