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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의 변화 May 10. 2024

의문

나는 왜 응급의학 전문의가 되었나 

의문     


몇 년 전 아버지께서 우울증으로 모교의 대학병원에 입원했다. 원래 우울증으로 약을 복용하다가 용량을 줄이고 있었는데 당시에 큰 교통사고를 낸 후 갑자기 상태가 나빠졌던 것이다. 불행 중 다행이었던 것은 끔찍한 사고였음에도 피해자가 사망하지 않았고 큰 수술을 여러 차례 받긴 했지만 상태가 좋아져 재활 중에 있다는 것이었다.  

우울증을 처음 진단받을 당시에는 원인을 몰라서 헤맸지만 (건강염려증과 불면증 증상이 주였다) 이번에는 악화 요인이 분명했기 때문에 어머니를 포함한 가족 모두는 지난번처럼 헤매지는 않았다. 대부분 어머니가 병실을 지켰고 나와 동생은 주말을 이용해 병문안을 했다. 폐쇄병동이 아닌 일반병동이어서 면회가 자유로웠다. 

2주 정도 입원해 있는 동안 두 번 정도 병문안을 했는데 두 번째 방문 때는 아버지와 병실에서 출발해서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대학교 교정으로 산책을 나갔다. 병원 정문을 향해서 걷다가 안이비인후과 병원을 건너서 백주년 기념관 쪽으로 향했다. 아버지는 입원해 있는 동안 매번 같은 코스로 산책을 하셨는데 결국 목적지 혹은 반환점은 매번 푸른 욕실 타일로(그렇게 보인다는 뜻이다) 덮인 공과대학 건물이었다. 

반환점을 돌고 병원으로 가는 중에 백주년 기념관 근처에서 화단 가운데 놓여있는 벤치에 앉았다. 


“난 저 건물만 보면 기분이 좋다” 하얀 바탕에 푸른 패턴이 들어간 환자복을 입은 아버지가 벤치에 앉은 채 공과대학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왜요?”

“너 때 대학 합격자 명단이 저기 벽에 붙었잖냐”


아버지는 내가 그 사실을 모른다는 걸 눈치챈 후 여태껏 열 번도 넘게 들었던 얘기를 반복했다. 얘기인즉슨 그해가 ARS로 합격자를 알려 주는 첫해였고, 당신은 공과대학 벽에 붙어 있는 합격자 명단을 확인하기 전에 이미 ARS로 내 합격 사실을 알았고, 모르는 척 어머니와 나를 데리고 학교로 왔고, 그날 이후로 며칠 동안 수도 없이 전화를 걸어 ARS에서 나오는 합격이라는 음성을 들었다는 그 이야기. 내가 유일하게 몰랐던 건 합격자 명단이 붙어 있던 장소가 그날의 산책 코스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 뿐이었다. 병실로 돌아가는 길에 멀리서 오르막 끝에 우뚝 솟은 병원 본관 건물이 보였다. 펠로우를 마치고 이곳을 떠날 때는 남아서 교수가 되는 이들이 부럽기도 하고 대단해 보였는데 이상하게도 지금은 하얀 가운을 입고 병원 안을 쳇바퀴 돌 듯 돌아다니는 나를 상상하면 왠지 모를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이십 년 넘는 시간을 이곳에서 보낸다는 게 내게는 생각만 해도 답답하고 고리타분한 일 같았다. 


“너는 여기로 다시 돌아올 일 없냐?”

“없어요. 너무 지겨워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물론 단지 지겨웠기 때문에 교수가 되지 않았던 건 결코 아니다. 

“그래도 한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려면 그 정도는 견뎌야지”


아버지가 건강이 조금만 좋았다면 혹은 우리가 이야기를 나눈 곳이 병원만 아니었다면 좀 더 따져 물었겠지만 더 이상 얘기하지 않고 그날의 병문안을 마쳤다. 

아버지는 삼십 년 넘는 세월을 군인으로 지냈다. 대령으로 전역을 한 후에는 잠깐 회사에 취직한 적도 있었지만 당신의 사고방식은 회사원보다는 군인에 훨씬 가까웠다. 후진국 시절에 한국에서 태어난 어르신들이 그렇듯 집은 가난했고 부모들은 먹고살기 힘들었고 번듯한 일자리는 턱없이 부족했다. 가난은 벗어날 수 없는 굴레였다. 벗어날 유일한 방법은 입신양명, 그러니까 공부였다. 다행히도 아버지는 공부를 잘했기 때문에 집 앞에 방죽이 있는 봉동읍 은하리라는 시골 동네를 벗어나 전주라는 대도시의 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고 사관학교를 거쳐 해군 장교가 될 수 있었다. 실제로 아버지가 어떤 군인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유능하고 선후배들에게 신망이 있는 분이었을 것 같다. 소위부터 시작해서 대령이 될 때까지 매번 1차에 진급이 됐고 경리병과(아버지는 배멀미가 심해서 해상근무를 주로 하는 전투병과가 불가능했다)의 우두머리가 될 때까지 초고속 승진으로 목적지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진급 심사에서 중요한 건 능력을 인정받아야 함과 동시에 ‘적’을 두지 말아야 한다. 심사에 들어온 열 명 중 한 명이라도 반대를 하면 아홉 명의 찬성은 무의미했다. 


하지만 일찍 진급을 한 사람은 그만큼 일찍 전역을 해야 할 가능성도 많았다. 해군 대령이 경리감이 아버지의 최종 목적지였다. 별을 다는 심사에서 낙방하게 된 아버지는 남들보다 좀 더 빨리 전역을 하게 됐다. 아마도 우리 삼 형제가 모두 이과를 하게 되고 전문직을 하게 된 데에는 아버지의 이런 경험이 영향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아무리 유능해도 심사에서 탈락이 되면 조직이 정해놓은 시스템에 의해서 쫓겨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은 것이다. 진급 심사에는 패자부활전이 존재하지 않는다. 패자가 되면 일반인이 되어야 했고 일반인이 되면 사회가 필요로 하는 기술이 있어야 했다. 아버지는 그때 아마도 진급과 전역, 또는 승진과 은퇴라는 운명으로부터 자유로우려면 전문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니 당신 생각에 의사라는 직업은 이미 전문적인 기술이 있으니 대학병원이라는 안정적인 조직 안에 되도록 오랜 시간 머물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는 것이었다. 어쩌면 당신이 사관학교를 지원하던 시절에 의사들은 의사 면허만 가지고 있다면, 더군다나 전문의이기까지 하다면 의심할 나위 없이 ‘전문가’라고 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적어도 내 생각엔 그렇다. 더군다나 그건 교수냐 아니냐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아버지와 더 이상 얘기를 할 수 없었던 게 단지 아버지가 환자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자리에서 단박에 이해를 시키기에서는 너무 복잡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우선 한 가지만 얘기해 보자면, 나도 아주 잠깐 교수였던 시절이 있었다. 응급의학과 전문의를 따고 군의관 3년과 펠로우 2년을 마치고 E병원에서 잠깐 조교수로 일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기에 나는 내가 이런 식으로는 더 이상 전문가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혹은 교수로 일하기 위해서는 진료 연구 교육이 가능해야 했지만 E병원은 전혀 그럴 수 없는 곳이었다. 내가 원한 건 ‘전문가’지 ‘교수’가 아니었다.


 나는 모교에서 펠로우를 하던 시절을 떠올릴 때마다 예전에 친구 J에게 들었던 얘기를 떠올리곤 한다. J는 술을 좋아했다. 하루는 버스로 두세 정거장 거리에 있는 친구 자취방에서 밤새워 술을 마시고 아침 9시쯤 깼다. 친구는 부랴부랴 학교 수업을 들으러 갔고 방에는 전날 먹고 남긴 빈 술병들 말고는 먹을 게 아무것도 없었다. 기숙사에서 지내던 J는 전날 퍼런 추리닝 바지와 검은색 반 팔 티 차림으로 친구를 만났기 때문에 아침에 일어났을 당시에도 그 차림 그대로였다. 그날 오전에 수업이 있던 J는 일단 아침을 먹기 위해서 ‘쓰레빠’를 질질 끌면서 밖으로 나왔다. 근처 백반집을 찾아 들어가 아침을 먹으면서 주인에게 버스정류장 위치를 물어보고 있었는데 뒤에서 “학생!”하면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네 평 남짓한 식당에 손님은 본인과 제복을 입은 사십 대 아저씨 뿐이었다. 

“어차피 나도 그쪽 가니까. 내 차 타고 가. 이거 먹고 같이 가자구.”


J는 그가 밥을 다 먹기를 기다렸고 먹고 난 후에 그와 함께 차를 세워 놓은 곳으로 갔다. 순간 깜짝 놀라서 그 자리에 멈춰 섰는데 그곳에는 영화 속 결혼식 장면에서나 보았던 앞뒤로 길쭉한 검은 지붕의 하얀 링컨 리무진 한 대만이 주인을 기다리는 커다란 세인트버나드처럼 주차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냥 일반 요금 내면 돼. 그 정도 돈은 있지?” 아저씨가 운전석 쪽으로 가면서 말했다. 

J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십 분 정도 걸려서 학교에 도착했고 학교 앞 횡단보도 앞에서 차가 멈췄다. 아침 수업을 들으러 오던 학생들이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차가 멈추자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차에 쏠렸다. J는 부담스런 시선을 느끼면서 차에서 내렸다. 차가 떠나자 다시 일제히 J를 쳐다봤다. 자신의 옷차림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것만 같았다. 대체 이 새끼 정체가 뭐지?, 하는 표정을 지으며. 

지금 생각하면, J가 지어낸 얘기일 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기도 하지만 ‘리무진 해프닝’이 펠로우 시절의 내게 상기시켰던 건 변하지 않는다. 당연한 얘기지만 리무진이 재벌 2세라는 걸 보증해 주지 않듯이 대학병원이 내가 전문가임을 보증하지는 않는다는 것. 하지만 우린 꽤 자주 우리가 탄 차와 나를, 또는 우리가 근무하는 곳과 나 자신을 동일시 하곤 한다. 아버지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던 건 그 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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