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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의 변화 May 10. 2024

선택

나는 왜 응급의학과 전문의가 되었나

선택       


작년 장모님 생신 때의 일이다. 당시의 생신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축하할 일이 많았는데 하나는 전 해 여름 거의 한 달 넘게 폐렴으로 위중했던 장인어른이 다행히도 상태가 좋아진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부모님이 드디어 재건축된 새 아파트로 입주를 마친 것이었다. 덧붙여 한동안 코로나 팬데믹 때문에 가족 모임을 맘 편하게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해의 생신 모임은 더 뜻깊었다. 

새로 이사한 집에 모이기로 했고 각 가정에서 한두 가지 음식을 준비해 가기로 했다. 사실 대부분 처남댁이 준비를 하고 아내와 처형은 한 두 가지 정도 음식을 준비해 가는 수준이었다. 예전에는 모임을 하면 장인어른께서 근처 수산 시장에 들러서 회를 떠오곤 했지만 지금은 상태가 좋아졌다곤 해도 그 정도의 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마침 우리가 그날 마트에 들를 일이 있었기 때문에 거기서 광어회를 사 가기로 했다. 


식탁에 모여서 우린 작년 장인어른이 입원했던 일을 떠올리면서 각자의 노년에 대해서 얘기했다. 아내는 아툴가완디의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서 읽은 대로 모든 사람들은 생전에 연명치료에 대한 계획을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정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를 했다. 장인어른은 폐렴으로 입원하기 훨씬 전부터 어차피 살고 죽는 건 하늘의 일이니 연명치료를 절대로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분명하게 얘기했다. 흉부압박, 기관삽관, 기관절개술까지. 그렇기 때문에 아마도-그런 상황이 오지 않아서 다행이었지만- 만약 당신의 병세가 악화돼 기계환기를 달고 연명치료를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 왔다면 가족들은 당신의 생전에 밝힌 의사를 따랐을 것이다. 


작년 이야기로 분위기가 조금 무거워진 것 같아서 내가 그 책에서 흥미롭게 읽었던 부분을 언급했다. 

“그 책에 보면 요양원 식사 시간에는 여기저기서 컥컥하는 소리가 많이 난다는 얘기가 있어요. 노인이 되면 경추 커브가 변형되면서 턱이 앞으로 나오게 되고, 그래서 음식 넘길 때 사레 드는 경우가 잦아진대요.”

“당신도 큰 약 그냥 삼키다가 사레들리는 경우 종종 있잖아. 나이 때문인가?” 

손윗동서가 옆에 앉아 있던 처형에게 물을 건네면서 말했다. 처형은 가슴을 주먹으로 문지르다가 물을 마시더니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 화장실로 가면서 아내를 불렀다. 화장실에서 등을 두들기는 소리가 몇 번 들리더니 아내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 당신이 와봐야 할 것 같아.”


혹시나 하는 생각에 화장실로 들어가서 보니 처형의 얼굴은 흙빛이었고 목을 두 손으로 감싸는 전형적인 유니버설 초크 사인(universal choke sign)은 아니었지만 누가 봐도 숨쉬기 힘들어 보였다. 나는 아내와 자리를 바꿔 처형의 등 쪽으로 옮겼고 명치에 왼손 주먹을 올리고 오른손을 그 위에 올려서 있는 힘껏 복부를 세 번 강하게 압박했다. 세 번째 압박에 ‘컥’하는 소리와 함께 담즙 빛깔의 덩어리가 입에서 튀어나왔다. 소화되다 만 두툼한 광어회였다, 우리가 그날 마트에서 사 온. 화장실 밖의 가족들은 아무도 몰랐지만 처형은 진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고 돌아왔다. 그걸 알고 있는 사람은 처형 외에는 나와 아내뿐. 

기도가 막혔을 때 시행하는 하임리히법을 기본인명구조술 강의를 하면서 여러 번 가르쳐 봤지만 실제 환자를 대상으로 현장에서 해본 건 처음이었다. 당연히 소아과 의사인 아내 역시 마찬가지. 처형에게 응급의학과 의사인 나조차도 처음 해봤다는 얘기를 듣더니 깜짝 놀라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물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응급실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결판이 나버리기 때문이다. 성공하면 아무렇지 않게 일상생활을 하는 것이고 실패하면 응급실이 아닌 장례식장으로 간다. 


예전에는 누군가 응급의학과 의사로서 가장 보람을 느꼈던 적이 언제냐고 물으면 애써 예전에 치료했던 환자들 중 누군가를 떠올렸지만 이제는 그날의 ‘하임리히 사건’을 얘기할 것 같다. 아주 가까운 사람을 내가 살렸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그날 시행했던 하임리히법 속에 내가 응급의학과를 선택한 근본적인 이유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하임리히법 뿐만 아니라 기도유지, 구조호흡, 흉부압박과 같은 심폐소생술의 기본요소도 마찬가지다. 죽어가는 환자를 언제 어디서든 즉각적으로 개입해 살릴 수 있는 마음가짐과 기술을 배울 수 있다는 것, 그게 내가 응급의학과를 선택한 이유라면 이유였다.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다른 사람들도 나와 비슷한 이유로 응급의학과를 선택하는 것 같다. 나보다 2년 후배인 H는 응급실 인턴을 돌 때 화재 현장에서 심정지로 발견돼 새벽 세 시에 응급실로 내원한 두 명의 아이를 치료하던 날 응급의학과를 하기로 결정했다. 병원에 수많은 의사들이 있지만 응급실에 온 두 아이를 살리기 위해 달려드는 의사는 결국 응급실에서 일하는 의사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눈앞에서 죽어가는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의사가 되자, 결국 과정은 달랐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같았다.   


중학교 2학년이었을 때 기타를 배우고 싶다고 부모님을 졸랐다. 어머니는 ‘딴따라’는 절대 안 된다면서 완고했고 조금 배우다가 금방 싫증 낼 거면 아예 시작을 말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초등학생 때 피아노를 배우다가 그만둔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피아니스트 한동일 씨가 1965년 리벤트리트 피아노 국제콩쿠르에서 우승한 후에 피아노 조기 교육 붐이 일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웬일인지 어머니는 며칠 후에 나를 클래식 기타 학원에(실은 가정집이었지만) 데리고 갔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마도 부모님은 둘째인 내가 형과 동생 사이에서 치이는 것 같았고,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자꾸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대들고 크고 작은 문제를 일으킨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더도 덜도 아닌 중2병이었다). 원하는 걸 들어주면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다. 무엇보다 클래식 기타를 배우는 게 재미있었고, 선생님을 좋아했고 그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즐거웠다. 카르캇시, 타레가, 소르의 곡을 연습하고 존 윌리엄스, 크리스토퍼 파크닝, 엠마누엘 바루에코의 연주를 들었다. 그러면서 막연한 불안감도 질풍노도의 분노도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뜬금없이 클래식 기타를 배우던 중학생 시절을 떠올린 이유는 피아노도 바이올린도 첼로도 클라리넷도 아닌 클래식 기타를 열심히 쳤던 이유가 응급의학과를 선택한 것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모든 이들의 무의식 속에는 선택 상황에서 작동하는 어떤 기준이 있다고 믿는다. 그건 신발을 고를 때나 가방을 살 때나 배우자를 고를 때나 모든 선택의 순간에 작동하고 더군다나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는 더더욱 그렇다. 클래식 기타를 배우러 어머니를 따라 갔던 중학생 시절의 마음도, 응급의학과를 하겠다고 얘기했던 인턴 시절의 마음도 지금은 알 수 없지만 하나만은 분명하다. 뛰어난 연주 실력은 아니었지만 클래식 기타를 치면서 즐거웠고, 주취 환자와 거친 보호자들을 상대하면서 힘들 때도 많았지만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한다는 것이 즐거웠고 그래서 응급의학과 의사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전문가가 되는 데 가장 중요한 건 좋아하는 일을 찾는 것이다. 좀 더 소극적으로 얘기하자면, 싫어하는 일을 선택하지 않는 것이다. 미래에 벌어들일 수입과 안정된 신분과 다른 사람들의 부러운 시선 때문에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외면하고 싫어하는 일을 선택해 버리는 실수를 범하지 말라는 것이다. 전문가가 되길 원한다면 우선 좋아하는 일을 시도해야 한다. 그래야만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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