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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의 변화 May 13. 2024

재난

나는 왜 응급의학 전문의가 되었나

재난     


1950년대 이전 미국에서는 일반의가 하우스 콜(house call)을 받고 왕진을 가는 것이 아주 흔한 풍경이었다. 그 당시에 일반의들은 환자의 연락을 받으면 적절한 장비를 가지고 방문해서 처치를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일반의들의 비율은 급속도로 줄었다. 의사들이 휴식 없이 왕진을 다녀야 하는 일반의보다는 더 많은 급여를 받으면서 병원에서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전문의를 선호했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전에 4명 중 3명이었던 일반의 비율은 1955년까지 3명 중 2명으로, 1966년까지 3명 중 1명으로까지 줄었다. 비록 지금처럼 전문적인 기술을 갖추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1940년대와 50년대에 왕진을 다니던 일반의들이 응급의학과 의사들의 선조라고 할 수 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에 병원이 의료시스템의 중심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왕진을 다니는 일반의보다는 응급실에서 근무하는 의사들이 미국 응급의료체계의 중심이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응급실 인력들이 제공하는 의료수준은 낮았다.


1960년대에 버지니아 주 알렉산드리아 병원 응급실에서는 미국 최초로 24시간 풀타임 응급실 전담의를 운영 시스템을 도입하였다. 알렉산드리아 플랜을 시작한 이들은 네 명이었다. 그중 한 명이었던 맥데이드는 그 당시를 이렇게 기억했다.

“일을 시작했을 때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사람들은 병원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의료행위를 우리가 독차지할 거라고 확신했어요. 많은 사람들이 응급센터 팀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보았죠. 우리를 지켜보는 관중이 셋이었습니다. 우리가 신경 써야 하는 사람도 셋이었구요, 환자, 병원, 다른 의료진”

또 다른 멤버였던 밀스는 이렇게 얘기했다.

“우리가 환자를 뺏어갈 거라는 티끌만한 가능성조차도 없애야 했습니다. 응급실에서 계속해서 치료하는 일도 없었고 같은 증상으로 다시 오는 환자도 없었죠”


88서울올림픽이 열리기 전 해였던 1987년에 올림픽 조직위원회에서 응급의료를 담당하는 시스템을 요구했다. 아마도 1960년 중반 미국 응급실의 모습이 1987년의 응급실 모습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다. 응급실 인력은 인턴밖에 없었고 모든 병원들이 마찬가지였다. 1987년에는 응급실 환자가 많지 않았지만 1989년에 전국민 의료보험이 실시되면서 응급실 환자가 갑자기 늘었다.

1960년대 미국이나 1990년대 한국의 응급실에서 필요로 하는 인력은 환자 분류, 협진 요청(또는 후송)과 급성기 치료를 할 수 있는 ‘전문화’된 일반의(뜨거운 아아 같은 명칭이다)였다.


91년 7월에 보건사회부(현재 보건복지부)가 응급의료 관리운영규칙을 발표하였고 이때 응급의학과 전문의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부각시키기는 했지만 기존 과들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했다. 파이를 나눠야 할 새로운 과가 생기는 것을 반길 리 없었다. 맥데이드의 말을 상기해 보라.

1992년 9월 7일 응급의학과를 포함한 3개 전문과목(핵의학과, 산업의학과 포함) 신설에 관한 공청회에서 대한의학회는 응급의학과를 전문과목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같은 해 12월 대한응급의학회지에 실린 제안서에서는 의심의 눈초리로 보는 다른 과들을 다분히 의식한 듯 ‘응급처치 후에는 각 해당 과로 치료가 인계되므로 기존의 의료영역을 침범하는 것이 아니라 미개척 영역을 개발하는 학문’이라는 구절을 추가했다.


90년대는 대형 참사가 많았다. 93년 7월 26일 오후 2시 20분에 김포에서 출발해 목포로 향하던 아시아나 항공기 733편이 추락하였다. 66명이 사망했고, 44명이 부상을 당했다. 같은 해 10월 10일에는 서해페리호가 전북 부안군에서 전복되어 292명이 사망하고 70명이 부상을 당했다. 재난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94년 10월 21일 7시 40분경 성수동과 압구정동을 잇는 성수대교가 붕괴하면서 49명이 추락하고 그중 32명이 사망하였다. 대교를 받치는 다섯째와 여섯째 다리 사이에 있는 상판 48미터가 이음새가 끊어지면서 내려앉은 것이다. 오전 7시 40분, 수많은 학생들이 학교로 가는 버스를 타고 그 다리를 지났을 것이다. 그 당시에 나 역시도 매일 한강을 건너서 학교를 다녔다. 생각해보면 진짜 아찔한 일이다. 95년 1월 28일 대한의학회는 드디어 응급의학을 전문과목으로 인정했다. 응급의학회의 꾸준한 노력도 한몫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성수대교 붕괴와 같은 초대형 재난들이 연속해서 터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직 하나가 더 남아 있었다. 성수대교가 끝이 아니었다. 1995년 6월 29일 서울 서초동에 있던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 502명이 사망했고 938명이 부상당했다. 6.25 전쟁 이후 가장 큰 인명 피해였다.


한때 에릭 시걸의 <닥터스>라는 소설이 베스트셀러였던 시절이 있었다. 바니 리빙스턴과 로라 카스텔라노가 주인공인 이 소설은 두 주인공이 동료에서 연인으로 발전하고 의사로서 성장하는 과정을 그리면서 동시에 194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있었던 의학사-예를 들면 폴리오 백신 개발이나 좋은사마리아법의 의회통과와 같은-를 기술하고 있다. 의대생이 등장한다는 것 외에는 특별할 게 없는 소설이지만 책 속에서 언급되고 있는 의학사는 꽤 흥미로웠다. 응급의학과와 관련이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소설의 시간적 배경이 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한국전과 베트남전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을 것 같다. 그 시기는 20세기에 가장 치열한 전면전이 있었던 시대였고, 전쟁이야말로 응급의학과가 가장 필요한 상황이었을 테니까.


88올림픽이라는 축제와 함께 태어나서 연이은 재난을 겪으면서 성장한 한국 응급의학과의 역사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한국 응급의학과의 최종적인 승인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와 같은 전쟁에 준하는 재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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