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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연락될, 혹은 연결될 (첫날, 둘째날)

졸업동기들과 함께 한 홋카이도 여행기

by 생각의 변화

여름밤 등이, 저녁 석양 속에서 신호 전 출발

-영화 <사이다처럼 말이 톡톡 솟아올라> 속 하이쿠-


첫날

탑승구 근처에 가니 아는 얼굴이 몇몇 보인다. 출발시간까지는 꽤 남았다. 며칠 전 학년 대표가 여행기를 써달라고 부탁했다. 흔쾌히 하겠다고 했는데 막상 쓰려니 막막하다. 인터뷰를 바탕으로 쓰기로 했으니 일단 말을 한 번 걸어 본다.

“여행에 참여하게 된 이유가 뭐야?” 내가 물었다.

“오랜만에 친구들을 볼 수 있잖아”

다른 이유가 있을 리 없다. 친구들의 ‘여행의 이유’를 엮어서 글을 쓰겠다는 내 계획은 초장부터 허망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아, 이러면 완전 나가린데. 비행기에 탑승해 자리에 앉아서 노트를 꺼냈다. 끄적거렸던 아이디어들을 주욱 훑어본다. 문득 궁금하다, 내 여행의 이유는 뭘까.

기내식을 먹으며 영화를 보다가 정신이 번쩍 든다.

용의자가 말한다, “침묵이 불법은 아니죠”

탐정이 말한다, “인간의 본성은 복잡하게 꼬여 있어서 파헤치려면 적절한 도구가 필요하죠”

침묵이 인간의 본성이고 침묵 속에 담긴 의미를 찾기 위해선 적절한 도구가 있어야 한다는 것. 영화가 끝날 무렵 내게 떠오른 도구는 질문이 아닌 관찰이었다. 그냥 사람들 속에 섞여서 관찰하는 것. 하긴 달리 뭐가 있으랴.


치토세 공항에 도착해 입국 심사를 통과하고 나오니 오후 한 시가 조금 넘었다. 숙소로 향하는 버스의 창밖으로 보이는 화단에는 샛노란 금계국이 한가득 피어있다. 금계국의 꽃말은 희망과 행복이다. 이 순간 우리에게 꼭 필요한 단어다. 숙소와 가까워질수록 창밖의 풍경은 점점 단순해진다. 보이는 건 거대한 브로콜리처럼 생긴 산등성이뿐.

도착한 숙소는 자작나무들로 빼곡한 산기슭에 있었다. 스위스의 리조트 건물처럼 직선으로 이루어졌고 유백색과 베이지색 외벽 위로 일렉트릭 블루로 칠해진 지붕이 덮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각자 배정받은 방으로 이동해서 저녁식사를 하기 전까지 쉬거나 식당에 모여서 맥주를 마셨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안도 타다오가 건축한 ‘물의 교회’를 보기 위해 로비로 내려갔다. 그다지 먼 거리가 아니어서 산책 삼아 걸어도 될 것 같았지만 가이드의 경고가 생각났다. 밤에는 야생곰들이 출몰해요. 아닌 게 아니라 숙소를 둘러싸고 있는 숲은 야생곰이 아니라 빅풋 서너 마리가 어디선가 ‘すみません(스미마셍)’을 외치며 불쑥 튀어나온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울창하고 으스스했다.

감상이 아닌 경험을 위한 건축물 ‘물의 교회’ 경험을 마치고 승차장에서 셔틀을 기다리는 동안 현수가 폰으로 촬영한 북두칠성을 보여줬다. 북두칠성을 직접 본 건 처음이다. 일곱 개의 별이 검은 하늘을 배경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이 순간 ‘별 헤는 밤’에 등장한 패, 경, 옥이 떠오르는 건 그냥 우연일까.


둘째 날

아침을 먹고 꾸물거리다가 조금 늦었다. 자리를 찾아 앉으면서 보니 지연의 첫째 요한이 보이지 않는다. 숙소에 있는 게 낫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스물한 살의 청년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여행 방식이긴 하다.

숲속에 작은 통나무집들이 여러 채 모여 있는 닝구르(요정) 테라스다. 이른 시각에 도착해서인지 아직 열지 않은 곳이 많았다. 누리가 세그웨이 전동휠을 타고 싶은 듯 근처에서 얼쩡거리고 있다. 카드로 결제하려고 하니 직원이 ‘온니 캐쉬’라며 손사래를 쳤다.

“환전해서 현금 있어”

버스 근처로 와서 민경에게 얘기했더니 옆에서 듣고 있던 혜진과 연아가 내 유년의 이모들처럼 서둘러 지갑을 꺼내려 한다. 하지만 누리는 이미 맘이 상했고 무엇보다 출발시간이 빠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미 버스를 향해서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다.


가이드가 인원체크를 하는데 아직 지연이 차에 타지 않았다.

“너희 엄마는 요정이어서 남기로 했나 보다” 현수가 에비후라이 한 바게쓰는 튀길 수 있을 것 같은 느끼한 농담을 지연의 딸 화니에게 건넨다. 화니가 잠깐 생각하는 것 같더니 살짝 웃는다. 던전 앤 드래곤 세계관에 따르면 엘프는 백 살이 넘어야 성인이 된다. 만약 지연이 성인 엘프가 되려면 아직 오십 년이나 더 남은 셈이다. 그때가 되면 아명을 버리고 아드리에, 알테아, 리아 같은 진짜 성인 엘프의 이름을 갖는다. 하지만 우리 중 누구도 그런 이름을 부를 일은 없으리라.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테니까. 아이고, 진짜 쓸데없다.


1989년 도카치산에서 흘러내리는 진흙 피해를 막기 위해 사방댐을 만들었는데 그 안에 있던 물의 일부가 흘러 나가 연못이 만들어졌다. 아오이 이케(青い池) 푸른 연못이 만들어진 배경이다. ‘청의 호수’라고도 하는데 막상 가보면 호수보다는 연못에 훨씬 가깝다. 물 안에 온천수에 들어있는 수산화알루미늄 성분이 원래 자라고 있던 나무들을 고사시켰고 그로 인해 청록빛 호수 중앙에 유령같은 나목들이 자리 잡고 있는 세기말적인 풍경을 만들어냈다.

출발을 기다리는 중에 지연에게 두 아이의 나이차(스물한 살과 열다섯 살)가 제법 나는 이유에 대해서 물었더니 둘 사이에 한 번 유산이 됐다고 한다. 생각해 보니 민경도 첫 번째 아이가 유산됐다. 하지만 만약에 유산이 되지 않았다면 누리는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의 계획은 두 명이었으니까. 때론 어떤 ‘만약’은 잔인하고 무책임하다.

숙소로 돌아와 식당으로 가는 통로에서 누군가 리스트의 사랑의 꿈을 연주하고 있다. 요한이다. 그렇다, 요한 세바스탄 바흐와 화니 멘델스존! 근데 바로크와 낭만파 사이에 고전파가 빠져 있다. 유산이 됐다는 지연의 말이 떠올랐다. 진짜 그런 맥락으로 이름을 지은 걸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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