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동기들과 함께 한 홋카이도 여행기
마지막 날
운카이(雲海) 테라스 탑승장에서 태현을 만났다. 여행하면서 보니 태현은 일본어를 꽤 잘하고 현지 사정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이십 분 정도를 기다려 곤돌라(케이블카)에 탑승했다. 조금 앞쪽에서 태현이 혼자 타는 것이 보였다.
곤돌라를 타고 올라가면서 내려다보니 산 중턱에서 사슴들이 평화롭게 무리를 지어 다니고 있다. 운카이 테라스에 도착했지만 날씨가 너무 맑아서 운해를 볼 수 없었다. 오늘이 바로 구름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에서 극혐한다는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에 해당하는 날인가 보다. 출발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서둘러 다시 곤돌라 승강장으로 이동했다. 거기서 태현을 다시 만났다.
“일본에 자주 오나 봐” 내가 묻는다.
“어, 자주 오지.” 태현이 고개를 끄덕인다.
“일본어는 언제 공부한 거야?” 민경이 묻는다.
“고등학생 때 일본에 교환학생으로 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부터.”
1988년 진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태현은 자매도시를 맺은 홋카이도 키타미 시의 초청으로 일본을 방문하게 된다. 그곳에서 태현은 키타미 중앙병원의 원장이었던 신경외과 이시카와 선생님 댁에서 6박 7일 동안 홈스테이를 하게 되었다. 이시카와 선생님은 한국에 호의적인 분이셨고 태현에게도 엄청나게 잘 해주셨다. 태현이 일본어를 공부하고 일본을 자주 방문하게 된 건 그 때문이다. 예상치 못한 누군가의 환대, 당시 육십 대였던 이시카와 선생님은 안타깝게도 9년 후 뇌출혈로 돌아가셨다.
삿포로로 가는 버스 안에서 앞 좌석에 있던 이언이 뒤돌아보면서 말했다.
“데이터 다 모았어?” 인터뷰를 모두 마쳤냐는 뜻인 듯. “그냥 모은 걸로 쓰는 거지”
“응급의학과 안 하면 요즘 뭐 해?”
농담으로 응급의학과를 끊었다고 하니 묻는 것 같다. 수술도 싫고 개업에도 별로 관심 없어서 응급의학과를 선택했지만 결국 화상병원에 취직해서 십 년 넘게 피부이식 수술 실컷 하고 개원하게 된 내 개인사를 얘기해주었다. 결국 나를 인터뷰하며 끝나는 건가.
이언은 하루 더 일본에 머물기로 했다. 영화 <러브레터>의 도시 오타루를 보기 위해서다. 하루 더 머물기로 한 인원들이 삿포로역에서 내렸다. 나머지 인원들은 피규어 삿포로 건물 앞에서 하차했고 근처에서 쇼핑을 하다가 다시 모이기로 했다. 내릴 때 연아가 기어이 누리에게 현금을 주었다. 누리가 원하는 캐릭터 인형을 사는 게 쇼핑의 가장 큰 목적이었던 우리에겐 최적의 장소였다. 하지만 피규어 삿포로를 3층까지 모두 둘러보고 근처 상점가에 있는 매장을 샅샅이 뒤졌지만 원하는 캐릭터를 찾지 못했다. 결국 다시 방문한 피규어 삿포로 3층 쇼케이스에서 원하는 것과 가장 비슷한 걸 찾았다.
치토세 공항에 도착해 출국수속을 마치고 면세점 주류 코너에 들렀다. 입구에 붙여 놓은 ‘야마자키 하쿠슈, 히비키 없습니다’라는 한글 공지문이 눈에 들어온다.
“많이 만들면 되잖아요?” 음식인문학 전문가 성준에게 물었다.
“원액이 없잖아. 몇십 년 전에 숙성시킬 때는 이렇게 많이 팔릴 줄 몰랐겠지”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속에서 내 여행의 이유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냥 여행기를 쓰고 싶었던 건 아닐까.
김환기의 작품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절친이었던 김광섭의 시 ‘저녁에’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푸른 바탕에 무수히 많은 점으로 이루어진 추상화이다. 작가는 그리운 친구들을 생각하며 한 점 한 점 그려나갔다고 한다. 내가 처음 구상했던 여행기는 친구들의 인터뷰를 엮는 것이었다, 한 점 한 점을 그려나가듯이. 하지만 인생이 그렇듯 글도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산토리는 야마자키 위스키가 그토록 많이 팔릴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고, 1989년 비에이에서 사방댐을 만들었던 이들은 푸른 연못의 나목들이 만들어내는 세기말적인 풍경을 상상할 수 없었고, 이시카와 선생님은 한국에서 온 소년이 훗날 의사가 돼 일본어를 배우고 일본을 좋아하게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하셨을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수술이 싫고 개업에도 관심이 없던 내가 화상병원에서 수술을 실컷 하다가 개업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세상은 그리고 인생은 우리가 함부로 예상할 수 없는 차원에서 흘러간다. 그럼에도 우린 그런 인생을 살면서 매 순간 무언가를 감히 선택한다.
사르트르의 말처럼 결국 인생은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이고, 현재의 나는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과거의 내가 했던 수많은 선택의 결과물이다. 글을 쓰는 동안 궁금했던 건 그 선택의 이유였다. 하지만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된 것 같다. 많은 이들이 이 여행을 선택한 건 또 다른 ‘C’를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우린 누군가와 연락(Contact)하고 연결(Connect)되기를 희망한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아마도 미래에도.
스위스 바젤과 미국의 휴스턴에서 날아온 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잠깐 하던 일을 멈추고 참가한 모든 졸업 동기들은 그런 연락과 연결을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꿈꾸었을 것이다, 연락의 꿈 혹은 연결의 꿈.
집에 돌아와 짐 정리를 마무리하고 면세점에서 구매한 삿포로 클래식을 한 캔 따서 식탁에 앉았다.
“나는 여행 내내 상순이랑 어머님이 많이 생각났어” 민경이 말했다.
윤동주는 ‘별 헤는 밤’에서 어린 시절의 친구들을 떠올렸고 김환기는 별을 바라보는 친구를, 혹은 별과 같은 친구를 생각하며 그림을 완성했다. 현수가 북두칠성을 보여줬던 그 순간 나는 더 이상 연락도 연결도 될 수 없는 병호와 상순을 잠시 떠올렸다. 둘의 부재를 새삼 생각하게 되는 것, 이것도 내가 한 여행의 일부가 아닐까.
참, 공항버스를 타고 오는 길에 자작나무의 꽃말을 검색해 보았다. 당신을 기다립니다. 그렇다. 나는, 아니 우리는 지금도 누군가를 기다린다. 언젠가 연락될 혹은 연결될 누군가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