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수공사
지하철역에서 내려 약속 장소인 한식당에 거의 도착할 무렵 모르는 번호에서 전화가 왔다.
“아랫집인데요. 안방 천장에서 물이 새요” 잔뜩 볼멘 목소리였다.
아랫집 아주머니 말로는 천장에서 물이 떨어져 관리사무소에 연락을 했고 윗집인 우리 집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방금 도착했는데 집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니 조금 난감했지만 어쩌랴. 장인 어른 생신 모임이었기 때문에 나만 가기로 했다. 왔던 길을 되짚어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이사 온 지 이십 년이 됐지만 집을 한 번도 손보지 않았다. 너덜거리는 도배지, 썩은 문짝과 색이 누렇게 변한 칠, 얇은 유리를 끼운 나무로 된 구식 창호. 귀신 나올 것 같은 집 상태를 보면 진작에 해야 하고도 남았지만 미루고 미루다 두 아이의 입시가 끝나는 시점인 작년으로 정했다. 4월에 시작하기로 하고 시공업자를 알아봤다. 같은 동에 사시는 목사님이 양 사장님을 추천했다. 목사님 댁과 근처에 사는 딸의 집 입주공사를 맡았고 최근에 개원한 아들의 샌드위치 가게 두 군데도 양사장님이 공사했다고 했다. 이 정도 인연이면 등을 떠다밀어야 마땅했지만 어쩐 일인지 목사님의 뉘앙스는 ‘추천’보다는 조심스러운 ‘제안’처럼 뜨뜻미지근했다. 말을 알아듣는 게 약간 어려울 수 있어요, 라는 약간의 염려와 함께. 마치 번듯한 직장과 원만한 성격을 가진 완벽한 맞선남의 가발 속에 숨겨진 치명적인 비밀을 알려주듯 은근슬쩍 경고등이 깜빡였다. 의사소통의 문제라, 하지만 겨우 그걸로? 목사님은 다른 곳도 알아보고 비교한 후에 신중하게 정하라고 신신당부했지만 우리에겐 그럴 시간과 정보가, 솔직하게 말하면 정성이 부족했다.
양 사장님은 칠십 대 초반 정도로 보였고 여기저기 얼룩이 묻어있는 파란색 작업복 조끼 차림이었다. 몇 년 전 앓았던 뇌졸중의 후유증으로 왼쪽 다리를 절면서 기우뚱하게 걸었고 구음장애로 발음이 부정확했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양사장님과 말을 할 때마다 튀어나온 단어들이 형체를 알 수 없게 부서져서 공중으로 흩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우린 매번 외국인과 의사소통을 하듯 겨우 알아들은 몇 개의 단어와 문맥을 통해서 전체적인 의미를 파악했다. 2주 동안 세 번 만났는데 왠지 모를 어수선하고 불안한 느낌만 남았다. 하지만 그게 구음장애 때문만은 아니었다. 결정적이었던 건 공사의 대체적인 계획조차 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원래 이렇게 아무 계획 없이 시작하는 건가.
“워낙에 계획을 차근차근 알려주면서 일하는 분은 아니에요. 일단 일을 시작하면 시원시원하게 하시니까 너무 걱정 마세요.” 목사님이 걱정하고 있는 우리 부부에게 말했다. 그 당시엔 몰랐다. ‘잘하시니까’라는 결과보다 ‘일을 시작하면’이라는 가정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공사를 시작하기로 한 날 양사장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관리사무소에서 과반수의 입주민 동의를 받아야 한단다. 주말에 부랴부랴 대행업체를 연락해서 이틀 만에 60세대 넘게 서명을 받아 월요일에 전달했다. 그날 오후에 다시 연락이 왔다. 이번에는 구청허가를 받아야 한단다. 한 번에 얘기해주지 않은 관리사무소에 화가 났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그랬을 리가 없다. 처음부터 얘기했을 것이다. 단지 우리에게만 전달이 안 됐을 뿐.
이게 끝이 아니었다. 다음 날 양사장님으로부터 다시 전화가 왔다. 구청허가를 받기 위해서는 건축사가 감수한 공사 전후의 설계 도면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쓸데없이 비싼 돈(어림잡아 3백만원) 들일 필요 없다며 본인이 다 책임질 테니 공사를 강행하겠다고 했다. 잔뜩 흥분한 양사장님을 겨우 달랬다. 화는 내가 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부랴부랴 건축사와 연락해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도면을 만들었고 결국 예정보다 2주 정도 늦게 공사를 시작했다.
오전 근무만 마치고 퇴근하는 날 공사 중인 집에 들렀다. 아이들 방에 생긴 컴퓨터 책상이 눈에 띄었다. 여러 겹의 투명한 바니쉬칠로 나무 무늬와 색을 살린 침엽수 합판으로 벽 귀퉁이에 맞춰 상판을 짰고 앉을 자리는 상판의 귀퉁이를 부채꼴 모양으로 둥그렇게 잘라서 다듬었다. 아래쪽으로 두 단으로 된 수납 상자 겸 다리가 직각으로 엇갈려 받치고 있어서 좁은 공간에서 활용도가 좋았다.
“손은 괜찮으세요?”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양사장님에게 음료수를 건네며 말했다. 양사장님의 선풍기 조끼에서 ‘윙’하는 바람 소리가 났다.
“괜찮아요. 바빠 죽겠는데 별것도 아닌 걸로 입원하라고 해서 이틀이나 까먹었네” 양사장님은 꼬질꼬질하게 때가 낀 붕대가 허술하게 감긴 왼손을 아무렇지 않다는 듯 요리조리 돌려보았다. 간암으로 항암치료 중인 그가 작업 중에 손을 다쳤다는 것도 걱정스러운 일인데 붕대를 감은 손으로 오토바이를 운전해서 두 군데의 현장을 바쁘게 다니는 건 더 아슬아슬해 보였다. “저희같은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르게 사시는 분이에요. 예전엔 소변줄 낀 채로 오토바이 타고 일하러 다닌 적도 있어요.” 작년에 목사님이 해준 얘기다.
“책상은 따로 말씀드린 적이 없는데……”
“아드님들 공부해야죠. 책도 많이 읽던데.”
말을 마친 양사장님이 습관처럼 허허 웃었다. 두 아들은 책상에서 공부하는 일이 거의 없고 대부분 내 책이라는 사실을 굳이 밝히진 않았다.
삼십 분 정도 걸려서 집에 도착했다. 곧 아랫집 아주머니와 함께 온 관리소 직원이 우리 집을 확인했다. “이건 왜 그런 건가요?” 직원이 부엌 바닥의 리놀륨 이음새를 따라 죽 이어진 얼룩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랫집 아주머니가 눈이 동그래져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작년에 부엌 싱크 아래쪽 배수로에서 물이 넘쳐서 그런 건데, 손 본 이후로는 문제 없었어요.”
직원은 방 안으로 들어가 에어컨과 배수로의 위치를 확인했다.
“에어컨은 문제가 될 게 없고 바닥에 깔려 있는 노후된 난방 배관에서 누수가 되고 있는 것 같아요. 토요일이니까 주말 지나면 업체에 연락해서 견적을 받으세요”
식당으로 돌아가서 생신 모임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저녁 아홉 시가 넘었다. 공사를 할 생각을 하니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작년에 리모델링을 했는데 설마 다시 바닥을 뜯어야 하나. 정성껏 만든 책장과 책상을 일 년 만에 모두 들어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골치가 아파지기 시작했다. 어쨌거나 양사장님하고 상의를 해봐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잠깐 했지만 이내 접었다. 올해 초부터는 전혀 연락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사가 끝난 뒤에도 연락해야 할 일이 몇 건 있었다. 부엌 싱크대 밑으로 연결해 놓은 세탁기 배수관 연결부위가 새고 있었고, 화장실 천장에서 녹물이 간간이 떨어졌고 세면대 배수관 연결 부위에서 물이 찔끔찔끔 샜다. 전화를 하면 곧장 받는 경우도 있었지만 나중에 연락을 해주는 경우가 더 많았다. 하지만 여름이 지나면서부터는 전화를 직접 받는 일도 거의 없고 답변도 간병인이나 사모님이 대신해 주는 경우가 점점 잦아졌다. 항암치료를 받은 후에 몸 상태가 나빠졌기 때문이다. 결국 세탁기 배수관 문제는 동네 시공업체를 불러 해결했고 겨울에 자꾸 방전이 돼 문제를 일으키던 디지털 도어락은 새 걸로 사서 바꾸었다. 그러면서 한 해가 지나갔다. 화장실 천장과 배수관의 누수는 여전히 미해결 상태로. 올해 초 화장실 변기가 금이 간 것을 발견하고 연락했던 게 마지막이었다. 역시나 응답은 없었다.
일요일에 예배를 마치고 누수공사를 해줄 만한 곳을 물어보다가 목사님께 양사장님의 안부를 물었다. “얘기 안 드렸나요? 올해 초에 돌아가셨어요.”
아, 나도 모르게 탄식이 나왔다.
“양사장님 돌아가신 후로 아드님도 연락이 안 돼요. 장례식장에서 보니 사모님보다 충격을 더 많이 받으신 것 같던데” 목사님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한동안 그를 일부러 연락도 안 받고 에이에스(A/S)를 책임지지 않는 무책임한 사람으로 생각했던 내 자신에 대해 반성했다.
그날 저녁에 아내가 말한다.
“우리 집이 마지막 공사였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조금 묘하네.”
아내는 거실 벽면의 책장을 보고 있고 나는 열린 방문 틈으로 그가 만든 책상을 본다. “우리 집이 양사장님의 유작인 건가.” 내가 말한다
“살아 계셨어도 결국 누수문제로 연락하진 못했을 것 같아. 전에도 바닥 작업을 힘들어하셨거든.”
양사장님의 일상은 이미 암을 진단받기 전부터 뇌졸중의 후유증으로 망가져 있었다. 거기에 더해 암세포가 몸을 망가뜨리고 항암치료로 일상이 파괴되었지만 그리고 결국엔 사망했지만, 찢어진 손을 붕대로 감은 채 먼지를 뒤집어써 가며 일을 하고 소변줄을 꽂은 채 오토바이를 타고 현장을 돌아다니는 그의 모습을 떠올리면 쉽사리 꺼지지 않는 어떤 불꽃 같은 게 느껴졌다.
이십 년 전 응급의학과 전임의 시절의 일이다. 외래 환자가 복부 CT를 찍는 중에 갑자기 혈압이 떨어져서 응급실로 옮겨졌다. 조영제에 의한 아나필락시스 쇼크. 경동맥에서 맥박이 안 만져져서 심폐소생술을 하면서 에피네프린을 주사했고 십 분 정도 지나자 맥박이 만져지면서 상태가 좋아졌다. 응급실에서 나간 검사 결과들을 확인하면서 복부 CT 영상을 보게 됐다. 모니터에는 저음영의 덩어리들이 간 내 여러 군데에 불길하게 퍼져 있었다. 전이성 간암. 죽을 뻔한 환자를 살렸다는 보람도 잠시, 어쩌면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내가 망쳐 버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저녁 회식 자리에서 주임교수가 물었다. “급성 심근 경색으로 써든데쓰하는 거랑 암 투병하다가 익스파이어(expire)하는 것 중에 선택할 수 있다면 뭘 선택해야 할까?”
“당연히 써든데쓰죠.”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의 전공의와 전임의들은 모두 같은 생각이었다. 나 역시도.
익스파이어, ‘파이어’로 끝나는 한국어 발음 탓에 나는 이 단어를 발음하면서 불꽃이 서서히 사그라드는 장면을 떠올린다. 이십 대 언젠가 떠났던 엠티 장소에서 시끌벅적하게 피워놓은 활활 타오르던 모닥불이 밤사이 사그라들어 깜부기불이 되고 결국엔 재가 되어 공기 속으로 흩어지는 장면을.
다시 그날의 저녁으로 돌아간다. 누군가 다시 묻는다. 나는 대답한다, 써든데쓰가 아니라 익스파이어라고. 언젠가 그런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