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생 공연 연습일지
0913 작품 선정
낙근, 성복과 함께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하는 연극 <퉁소 소리>를 보았다. 남자 셋이 연극을 보러 다니는 게 흔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우리에게 딱히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어찌하다 보니 연극반이라는 동아리에서 선후배의 관계로 연을 맺게 됐고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도 연락이 돼서 그냥 술 마시는 것보다는 뭐라도 같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일 년에 서너 번 연극을 보러 다닌 게 전부다. 벌써 십 년쯤 됐다.
오늘은 좀 특별한 날이다. 낙근의 제안으로 오비(졸업생) 공연을 위한 첫 준비모임을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작품을 정하고 구체적인 것들을 대략 정해보기로 했다. 단톡방에 후보 작품 세 개가 올라왔다. 이현화의 <불가불가>, 패트릭 해밀턴의 <로프>. 이미경의 <그게 아닌데>.
<불가불가>는 한국 연극의 르네상스기였던 1980년대에-1987년 채윤일 연출로- 초연된 작품이다. 극단 목화 오태석의 <부자유친>, 극단 미추 손진책의 <지킴이>, 극단 산울림 임영웅 연출의 <유토피아를 먹고 잠들다>. 1987년 제11회 서울연극제 희곡집에 실린 작품들을 보면 왜 이 시기가 한국 연극의 르네상스였는지를 알 수 있다. 40년 가까이 지난 작품이지만 주제 의식과 스타일이 모두 참신하고 혁신적이다. 지금 공연해도 전혀 유행에 뒤떨어진 느낌이 없을 정도다.
배우 11 뭐라 하시었소?
배우 5 불가불가
배우 11 아니, 불가불, 가요, 아니면 불가, 불가요?
-<불가불가> 중에서-
역사극을 만드는 공연장에서 일어나는 일을 소재로 만든 서사극인데, 제목이기도 한 ‘불가불가(不可不可)’라는 단어 속에 무능력하고 기회주의적인 지식인과 관료들에 대한 우회적인 비판이 담겨있다. 브레히트가 고안한 서사극이라는 형식이 감정이입을 통한 카타르시스가 아닌 거리두기를 통한 이성적 비판을 목표로 한 것이므로 이 연극의 방향성과도 잘 맞아 떨어진다. 여담이지만, 연극 포스터 오른쪽 하단에는 ‘*이 演劇 은 꼭 1층에서 보셔야 합니다. *잊지 마세요’라는 구절이 적혀있다. 아마도 배우들이 무대와 관객석을 구분하지 않고 돌아다니며 연기를 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가스등>이라는 작품으로 유명한 패트릭 해밀턴의 <로프>는 내가 추천한 작품이다. 워낙 스릴러나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편인데, 히치콕이 영화로 만들었다는 얘기에 끌려서 읽게 됐다. 오로지 쾌락을 이유로 로널드를 살해한 브랜던과 그라닐로는 로널드의 아버지와 자신의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한다. 엽기적이게도 거실에 놓인 궤짝 속에 로널드의 시신을 넣은 이들은 시간이 흘러갈수록 점점 더 궁지에 몰린다. 서스펜스를 최대한 살리고 쾌락적 살인을 적절한 방식으로 손을 보면 재밌는 작품이 될 것 같았다.
<그게 아닌데>는 2018년 7월에 극장 혜화동 1번지에서 셋이 같이 본 연극이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연극을 보고 나서 검색을 해보니 상을 꽤 많이 받은 작품이라서 조금 놀랐다. 코끼리가 동물원에서 탈출해서 유세장을 덮쳐 차기 대통령 후보인 국회의원에게 부상을 입힌다. 이 때문에 조련사는 경찰서로 가서 조사를 받게 되는데 조사 과정에서 의사 형사 어머니가 등장해 대화를 하지만 조련사가 말하고자 하는 진실은 아무에게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작가는 여기서 더 나아가 조련사가 보는 판타지를 통해서 ‘불통’의 비극이 실은 조련사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 우리 모두, 그러니까 현대인들 모두에게 적용되는 보편적인 차원의 문제로 확장시킨다. 이 지점에서 이 연극은 진짜 조련사 짓인가? 하는 미스터리와 척척 맞아 떨어지는 티키타카로 무장한 블랙코미디를 넘어서 불통의 시대를 살고 있는 관객들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한다.
연극을 보고 난 후에 교보빌딩 안에 있는 퓨전 막걸리 주점에 자리를 잡고 작품 선정에 대한 얘기를 시작했다. 어느 정도 예상된 일이었지만 결정은 <그게 아닌데>로. 작품 선정에서 가장 중요한 건 연출의 마음이다. 연출을 맡은 낙근이 강력하게 원한 것도 있었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그게 아닌데>는 장점이 많았다. 다섯 명의 배우가 골고루 자기 분량이 있고 취조실이라는 무대만 있으면 된다는 것도 장점이다. 무엇보다 코미디라는 점, 알쏭달쏭한 작품들(이를 테면 체홉의 작품들)은 아마추어인 우리가 아무리 잘해도(이것도 거의 불가능한데) 관객들의 반응을 끌어내긴 어렵지만 코미디라면 ‘잘만 한다면’ 쉽게 호응을 끌어낼 수 있다. 물론 잘만 한다면.
교보빌딩을 나와서 율곡로를 따라서 안국역 쪽으로 걸었다. 딱히 목적지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쪽 길이 밤에 산책하기가 좋았기 때문이다. 헌법재판소를 지나 기와지붕이 있는 건물의 2층 카페로 들어갔다. 좀 더 구체적인 것들을 정했다. 성복의 큰 애가 수험생이어서 공연일은 내년 11월 19일 수능시험 이후로 잡기로 했다. 2주 후로 다음 연습 날짜를 정하고 연습 장소는 몇 군데 후보지 중에서 되는 곳을 하기로 했다. 엄마 역할을 맡을 배우로 이은하 선배를 추천했다. 올해 초에 졸업생 공연을 하게 되면 자신을 꼭 불러달라는 얘기를 지인으로부터 들었기 때문이다. 비교적 비중이 적은 동료/삼코 역할을 맡을 배우는 연습이 어느 정도 모양새를 갖추면 천천히 찾아보기로 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