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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아닌데(4)

졸업생 공연 연습

by 생각의 변화

1004 실종신고


2018년에 <그게 아닌데>를 보고 난 후에 근처 맥주집에서 연극에 관해 얘기하다가 왜 하필 코끼리일까에 대해서 얘기했다. 당시에 낙근은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우화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라는 답변을 내놨다. 발을 만진 장님은 발을, 코를 만진 장님은 코를, 엉덩이를 만진 장님은 엉덩이를 코끼리라고 생각한다는 것. 당시에는 고개를 끄덕였는데 나중에 보니 진짜 이유는 전혀 뜻밖이었다.

어느 예능프로에 나온 영화배우가 연극배우 시절에 ‘코끼리 탈출’ 사건으로 교통이 마비돼 연습에 늦었다는 얘길 선배에게 했다가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한다고 엄청나게 혼났다는 에피소드를 얘기했다. 그 사건이 바로 연극 속 사건이다. 이 작품은 2005년에 실제로 있었던 서울 어린이 대공원 코끼리 탈출 사건을 모티브로 했던 것이다. 살다 보면 서울 안 가본 놈이 이기는 법.


근데 코끼리는, 아니 ‘그게 아닌데’는 그리 먼 곳에 있지 않았다.

추석 연휴가 시작되는 토요일에 김포에 있는 처남 집에서 처가 사람들이 모이기로 했다. 6시 30분인 약속 시간에 맞추기 위해 한 시간 전에 집에서 출발했다. 63빌딩을 바라보며 강변도로를 운전하는 중에 아내의 핸드폰으로 전화가 왔다. 아침 10시 30분에 외출한 장인이 6시가 다 됐는데도 집에 안 들어오셨다는 것. 계획을 바꿔 김포가 아닌 처가가 있는 영등포 댁에서 만나기로 했다. 처남은 아버님이 자주 가시는 곳을 둘러 보고 있었고 아내는 장인에게 몇 번 전화했지만 핸드폰이 꺼져 있다는 안내음만 들을 수 있을 뿐. 결국 경찰서에 실종신고를 냈다.


신고를 한 뒤 얼마 안 돼서 관할 경찰서의 경찰관들이 출동해 아파트 주차장에서 만나 경위서를 작성하고 있을 때 장모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장인이 집 근처까지 오셨다는 전화를 받았다는 것이다. 두 명의 경찰관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치매라는 것이 갑자기 나빠지기 때문에 이번 일을 계기로 지문 등록을 하거나 목걸이를 하시는 걸 권했다.

그날 아침 아버님은 안양천 쪽으로 산책을 나갔고 강변길을 걷다 보니 너무 멀리까지 가게 됐다. 너무 멀리 나왔다는 생각이 들어 근처에서 지하철역을 찾아보려 했지만 근처에는 없었고 결국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지하철을 탔지만 원래 타던 방식이 아니라 갈아타면서 많이 헤맸다. 올해 92세이시니 너무 당연한 일이다. 그날 아버님의 만보기에 찍힌 게 2만 보가 넘었다. 대략 15킬로미터 정도를 걸은 셈이다.


“아버지 핸드폰을 꼭 켜놓으세요. 그러면 길을 잃어버려도 저나 오빠 언니한테 연락하면 되잖아요.” 아내가 말한다. 결국 문제는 길을 잃어버린 게 아니라 연락이 안 되는 것이다. 아버님은 습관처럼 잘 때 핸드폰을 꺼놓고 아침에 외출할 때 켜시는데(핸드폰을 켜놓는 것도 돈이 들어간다고 생각하시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과정에서 잊어버렸거나 제대로 켜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아버님은 핸드폰을 절대로 꺼놓은 적이 없다고 하신다. 옆자리에 앉은 장모님은 못마땅한 듯이 연신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다. 평소에도 장인은 항상 다니던 지하철도 갈아 타는 걸 힘들어 하신다면서 멀리 외출하는 것 자체를 맘에 안 들어 하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루 종일 집에만 틀어박혀 계시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뭐 어차피 그게 가능하지도 않고. 우리 모두는 아버님의 얘기에 고개를 주억거리긴 했지만 핸드폰이 처음부터 제대로 켜져 있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이젠 저녁에도 핸드폰 켜놓고 주무세요.” 처남이 다짐하듯 다시 말한다.


놀랍게도 다음 주에 이 모든 것의 진실을 밝혀주는 묘한 상황이 발생한다. 이번에는 아버님이 아닌 아버님의 핸드폰이 ‘실종’된 것이다. 두 분은 그날 낮에 아내의 병원에 들러 약을 처방 받고 집으로 돌아왔고 장모님은 친구를 만나기 위해 외출을 하셨다. 장인은 집에 와서 아무리 찾아봐도 자신의 전화가 없어서 전화를 해서 병원에 전화를 두고 온 것이 아닌지를 확인했다. 전화는 병원 어디에도 없었다. 혹시 중간에 어딘가에서 흘린 건 아닐까 해서 전화를 했지만 핸드폰은 꺼진 상태.


가족 단톡방에 핸드폰 실종에 관해서 아내는 두 가지 가설을 제기했다. 하나는 병원에서 집으로 가는 길 어딘가에서 분실했다. 다른 하나는 엄마(장모님)가 아버지 폰을 착각해서 들고 나갔다. 아내는 후자의 가능성이 더 높다고 봤는데 왜냐하면 그날 아버지의 치매약 용량을 조절하기 위해 시행한 간이치매검사 MMSE(Mini Mental State Exam) 결과가 26점(24점이상이면 정상)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날의 실종도 치매의 증상이라기 보기 어렵고 핸드폰이 사라진 것도 인지 능력이 떨어졌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결국 문자 그대로 진실은 어머님의 손에.


단톡방의 모든 이들이 결과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을 때, 어머님은 저녁 6시에 (묘하게도 그날 아버님의 귀가시간과 비슷하다) 아버님의 핸드폰을 ‘손에’ 들고 귀가했다.

그날 아버님이 주장했던 진실을 믿어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심지어 당신조차도 미심쩍어하셨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아버님의 결백함(당신의 전화기가 꺼져 있었다는 주장)을 가장 강하게 의심했던 장모님이 증명해 준 상황이 된 것이다. 그날 이후로 아버님도 어쩌면 ‘그게 아닌데’를 내내 속으로 되뇌였을 수도.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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