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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아닌데(3)

졸업생 공연 연습 일지

by 생각의 변화

0928 대본 리딩


2주 동안 나는 두 가지 중요한 일을 했다. 하나는 내가 다니는 거룩한 나무 교회 세미나실을 연습 장소로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엄마역을 맡을 이은하를 영입했다. 저녁에 동네를 산책하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전화했다. 오랜만에 하는 전화라 서먹서먹할 줄 알았는데 텐션이 높은 은하 선배의 반응 때문에 그럴 겨를이 없었다.

“연락해 줘서 너무 너무 고마워.”

나는 연극의 대략적인 줄거리와 현재 모인 멤버들에 대해서 얘기한다.

“당연히 하는 거지. 두말하면 잔소리지. 작품도 너무 재밌던데. 호호호. 내 평생에 이런 기회가 또 있겠니.”


사람들은 세월이 지나면 변하기도 하지만 전혀 변하지 않는 부분도 있다.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높은 텐션 하나만큼은 변하지 않은 게 분명하다. 은하는 내가 신입생 때 2학년이었고 <신이국기>때는 동료 배우로, <라생문> 때는 연출로 함께 연극했다. 당시에 나는 신입생이어서 어리버리하기도 했지만 은하의 직설적인 말에 자주 상처를 받곤 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의 내가 워낙 자존감이 낮았기 때문이었을 것 같다. 반대로 옆에서 보기에, 다른 배우들도 모두 느꼈지만, 은하는 직선적이고 타협이 없는 낙근의 연출 방식 때문에 힘들어 했던 것 같다, 지금은 모두 지난 일이지만. 설마 아직도 앙금이 남아 있는 건 아니겠지? 조금 걱정이 됐지만 목소리를 들어보니 전혀 신경 쓰는 것 같진 않았다.


우린 역사적인 첫 모임을 2025년 9월 28일 오후 2시에 거룩한나무 교회 3층 세미나실에서 했다. 작품에 대해서 서로 얘기했고 모두 작품에 만족하는 것 같았다. 낙근의 주도하에 몇 장면을 나누어서 리딩을 했고 캐스팅에 대해서 얘기했다. 일단 엄마 역은 은하, 형사 역은 낙근으로 정해지는 분위기였지만 조련사 역이 나와 성복으로 갈렸다. 낙근은 내가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억울한 듯한 톤이 조련사와 어울린다는 쪽이었고 은하는 외모에서 풍기는 느낌이 성복이 조련사에 가깝다고 보았다. 연기를 무언가를 창조하는 과정으로 생각한다면 조련사 역을 맡는 것이 좋았지만 잘할 자신이 없었다. 성복에게 물어보니 나와 비슷한 생각인 것 같았다.

나의 연출이었던 낙근과 은하가 나를 캐스팅하는 방식과 관련된 두 가지 상반된 경험이 있다. 하나는 91년 신입생 때 낙근이 연출한 <신이국기>때 나는 주인공 서동으로 캐스팅 됐다는 사실을 여행하고 돌아오는 길에 들었다. 당시에는 핸드폰이나 비퍼가 없던 시절이어서 연습을 빼먹고 강원도로 땡땡이를 친 내게 연락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대체 내가 왜? 혹은 나를 왜? 무대에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데.


다른 하나는 93년 은하가 연출한 <라생문> 캐스팅에서 내가 떨어진 것이다. 이 일이 굉장히 의외였던 건 당시에 나는 다음 해인 94년 연출로 예정돼 있었고, 연습을 하고 있는 배우들 중에서 가장 고학년이었고, 나름 연기력도 괜찮은 배우라고(나만의 착각?) 생각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93년 이후로 세란극회 공연에서 캐스팅에 떨어진 배우는 없었다. 그러니 나는 세란극회 역사상 마지막 캐스팅 탈락자였던 셈이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나랑 같이 떨어졌던 여학생은 그날 이후로 연극반을 나갔다. 가끔 십 년 이상 차이가 나는 연극반 후배들한테 이 얘길 하면 눈이 동그래지면서 “캐스팅에 떨어졌다구요? 어떻게 그런 일이!”라고 소리치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입틀막을 한다. 캐스팅에 떨어진 후 연극반을 그만둔 후배가 유별난 건 아니라는 얘기다.


“오빠는 은근히 영환이를 ‘패이버(favor)’ 하는 게 좀 있어”

연습을 마치고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신이국기> 시절 얘기가 나왔을 때 은하가 한 얘기다. 여덟 명의 배우(<라생문>의 등장인물)가 필요한데 열 명이 지원했다면 두 명은 반드시 떨어져야 한다, 그게 누구든 간에. 하지만 그건 좀 특이하다고 생각하면서 무대에서 걷지도 못하는 내가 주인공에 뽑힌 것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은하가 콕 집어낸 것처럼 누군가를 ‘패이버’ 하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는 것은 더더욱.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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