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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아닌데(6)

졸업생 공연 연습

by 생각의 변화

1102 공감 강박


캐스팅을 정하고 첫 번째 만남이다. 낙근은 적어도 2주에 한 번 정도는 만나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연습 시간이 너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일 년 동안 한 달에 두 번씩 만나는 걸로 대략 계산해도 우리가 만날 수 있는 횟수는 24-6회 정도이고, 시간으로 따지면 고작 104시간이 조금 넘는다. 학생 때 두 달 동안 하루에 대여섯 시간 정도 주 5회 연습했을 때 240시간 정도를 연습했으니까 이래저래 연습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연극을 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흔하게 하는 질문 중에 하나는 “그 많은 대사를 어떻게 외워요?”이다. 사실 학생 때는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도 대사가 외워졌다. 무대에 올라가서 똑같은 장면을 수도 없이 ‘큐!’와 ‘컷!’ 소리에 맞춰 반복하기 때문이다. 무대에 올라가지 않을 때는 객석에서 혹은 연습 장소 어딘가에서 혼자서 혹은 다른 배우나 선배와 함께 연습을 하기 때문에 외우고 싶지 않아도 저절로 외워질 수밖에 없다. 낙근은 무대에 올라갔는데 대사가 생각이 안 나서 진땀을 빼는 악몽을 가끔 꾼다고 하고 은하와 성복 역시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 대사량이 많지 않지만 대부분 무대에 있는 나의 고민은 비슷하지만 조금은 다른, 언제 대사를 치고 어떤 리액션을 취해야 하는지이다. 하지만 결과는 비슷했다. 그런 걸 신경 쓰다 보면 결국 대사를 잊어버린다.


3주 동안 아무것도 안 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출퇴근하는 차 안에서 리딩 녹음한 걸 들으면서 차 안에서 큰 소리로 연습도 해보고 조금 긴 대사는 짬이 날 때 틈틈이 외웠다. 하지만 막상 무대에 올라가서 몸을 움직이면서 해보니 모든 게 뒤죽박죽. 어디 앉아야 하는지 시선을 어디를 봐야 하는지 어느 쪽으로 움직여하는지를 신경 쓰다 보면 머릿속이 하얘졌다.

첫 장면을 시작하자 낙근은 대사 행간에 숨어 있는 동기와 동선들을 혹은 시선들을 마치 대본에 적혀 있는 걸 읽어내듯 찾아내 알려준다. 내가 연출했던 경험에 비추어보면 무대에서 직접 연기를 하고 있을 때보다 연출의 시점에서 바라보면 대사 행간에 숨어 있는 동선과 동기가 더 잘 보이긴 하지만 또 어느 정도는 훈련에 의해서 좋아지지만, 모든 연출이 낙근만큼 날카로운 감각을 갖고 있는 건 아니다. 내가 항상 부러워하는 능력.

“낙근 오빠는 진짜 서브텍스트를 귀신같이 읽어내는 것 같아. 천잰가봐.” 아니나 다를까 은하가 낙근이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 나와 성복을 향해서 얘기한다. 무대에 올라와서 머릿속이 하얘진 나는 그 말에 반응을 하는둥 마는둥 한다.

의사와 조련사의 대화는 비슷한, 의사가 질문을 하고 조련사는 가끔씩 대답을 하는 형식으로 계속 진행된다. 의사의 대사 중에는 반복적으로 조련사의 대답에 긍정하는 대사가 나오는데 정신과 의사인 은하가 보기에는 정신과 의사들은 직업병처럼 ‘공감 강박’ 같은 게 있다고 한다. 예를 들면, 이런 부분이 그렇다.


의사 코끼리 전문가답군요. 전 선생님 공상까지 간섭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현실과 공상을 구분해서 말씀해 주셔야 해요. 그래야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습니다.

조련사 엄마한테 전화해야 되는데.

의사 그렇죠. 엄마한테 매일 전화로 보고를 하셨죠?

조련사 점심에 전화 못했는데.

의사 이젠 그러지 마세요. 엄마의 말에 구속될수록 공상의 영역으로 도피하게 되는 거예요. 공상이 무슨 뜻인지 아시죠?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을 생각하는 거예요. 코끼리가 비둘기 나는 걸 보고 쫓아 달려갔다. 그런 게 공상이죠.

조련사 달린 게 아닌데.

의사 예. 뛰었죠. 그렇게 날뛰는 코끼리가 무섭지 않으세요?


은하의 말에 따르면 정신과 의사는 환자의 얘기가 아무리 황당한 내용이라고 생각해도 습관처럼 혹은 강박처럼 ‘공감’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형사인 낙근이 나오는 장면을 연습하고 나니 세 시간이 지났고 중반 이후에나 등장하는 엄마는 아직 시작도 못 한 상태였다. 은하는 상관없다고 했지만 3주 만에 만나서 무대에 올라와 보지도 않고 끝낼 수는 없었다. 조련사와 엄마는 주로 의자에 앉아서 하는 장면인데 이상하게도 의사나 형사와 하는 장면에 비해서 좀 편한 느낌이었다. 조련사의 역할이 어떤 말이나 행동 없이 거의 90퍼센트가 리액션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상대역과 상관이 있는 건 아닐까.


은하의 연기는 직관적이고 감정이 풍부하고 어떤 느낌인지가 잘 와닿기 때문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가 대략 머릿속에 떠오르는데 성복의 연기는 혹은 의사라는 역은 내 맘에 와닿는 ‘뭔가’가 (그게 뭔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없다. 그건 대사를 외우고 안 외우고와는 조금 다른 문제였다.


오늘 연습 초반에 은하가 성복이와 얘기하다가 “너 너무 T 아니냐. 왕 T네. 왕 T.”라며 혀를 내둘렀는데. 어쩌면 성복의 성격이나 연기를 하는 기본적인 방식과 관련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복은 연극반 선배들이 습관처럼 얘기하는 인물에 ‘공감’하라는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나는 절대로 (작품 속에만 존재하는) 그 사람이 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래서 성복이 생각해 낸 건 논리적으로 그 상황에 맞는 가장 적절한 표정 말투 행동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좀 심하게 얘기하면, 사이코패스들이 상대방의 표정을 학습함으로써 감정을 읽어내는 방식과 비슷하다.

“아니, 대체 어떻게 이런 애가 연극반을 들어왔지” 은하가 눈이 동그래진다.

“나도 신기하다니까.” 낙근이 말한다.


'공감 강박’이 있어야만 하는 정신의학과 의사 역을 맡은 ‘공감 거부’ 성복이 어떻게 연기할지 기대도 되고 걱정도 되고. 하지만 문제는 성복이 아닌 바로 나. 대체 이 조련사라는 역을 어떻게 연습해야 하는 걸까.

장면연습을 끝내고 나니 다른 사람의 얼굴에도 수심이 가득하다. 연습 시간이 부족하다는 걸 모두 절감한 것이다. 이 연극을 과연 내년에는 올릴 수 있을까.

“연습하는 걸 보니까 이 연극 너무 재밌다. 진짜 잘될 것 같아. 너무 기대돼.”

은하가 나머지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밝은 표정으로 말한다.

“은하야 우린 환자가 아니야.” 낙근이 웃으며 대답한다. 그렇다, 공감강박.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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