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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아닌데(13-2)

졸업생 공연 연습

by 생각의 변화

1214 특별출연


이번 주는 연출 없이 연습하는 날이다. 전에 성복과 둘이서 연습을 한 적은 있지만 나, 은하, 성복 셋이서 연습한 건 처음이다. 버스가 너무 일찍 도착해서 당일 만료였던 무료 음료 쿠폰을 쓰기 위해 스타벅스에 들른다. 카페라떼를 주문하고 주문표를 받고 기다린다. 그 사이 은하가 1시 30분에 맞춰서 가겠다는 톡을 올리고 성복이 오늘 연습은 2시가 아니냐는 톡을 올린다. 너무 일찍 도착해서 1시 30분도 충분할 것 같았는데 ‘계획’(이런, 이 단어 또 나왔다)과 달리 늦어진다. 직원이 음료를 건네는데 뭔가 혼선이 있는 것 같다.

“저희가 두 번이나 ‘아이스’인지를 확인했는데요.” 직원이 말한다.

“죄송해요” 손님이 말한다.

예닐곱 살로 보이는 딸과 함께 온 오십 대로 보이는 여자가 난감해하며 어쩔 줄 몰라한다. 잠시 후에 오른쪽 편의 출입문이 열리고 키가 훤칠한 남자가 성큼성큼 들어온다. 남자는 여자에게 ‘왜 이렇게 오래 걸려?’라고 나직하게 묻는다. 특별히 화가 난 것 같지는 않고 여자의 말을 듣더니 고개를 갸웃한다. 근데, 어 아는 얼굴이다. 영화배우 황정민 씨다. 몇 분 정도가 더 흐르고 캐리어에 든 음료를 받고 그가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정중히 건네고 딸과 함께 나가서 밖에 세워둔 검은 색 SUV에 오른다. 비록 금기어였지만 역시 계획대로 되지 않아야 뭔가 쓸 게 생기는군.


예상보다는 조금 늦게 연습 장소에 도착하고 곧이어 성복도 도착한다. 우린 어머니와 조련사가 나오는 장면을 시작으로 장면연습에 들어간다. 은하는 여전히 대사를 외우는데 애를 먹고 그래서인지 감정에 집중하지 못한다. 매번 막히는 단어들을 정리한 단어장(?)을 옆에 두고 밑줄과 동그라미를 연신 그리며 외운다. “아, 이거 의과대학 공부하는 거랑 똑같아.” 은하가 탄식하며 여러 번 틀린 단어를 소리 내어 반복한다. 같은 장면을 몇 번 반복하면서 대사가 입에 붙고 은하의 연기는 좀 더 나아진다. 얘기를 들어보면 은하는 대사가 안 외워지는 것과는 별도로 어머니가 보이는 여러 겹의 감정을 표현하는데 애를 먹는 것 같다. 예를 들면 화가 나지만 웃으며 얘기하고, 황당한 얘기를 천연덕스럽게 말하고, 슬프지만 행복하게 말하는 걸 어려워한다. 사실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지만 아마도 이것 역시 은하의 성격과 관련이 있을 것 같다. 좋으면 칭찬하고 잘못하면 지적하고 화가 나면 화를 내고 불만 있으면 불평을 하는 본인의 성격과 어머니의 이중적인 캐릭터가 잘 안 맞는다고 한다. 본인에겐 그런 여러 겹의 래이어(layer)가 없다고.


본인의 성격에 맞춰서 어머니를 연기하는 것도 나쁜 건 아니지만 연기의 재미, 혹은 예술의 본질 중에 하나는 ‘불일치’ 또는 ‘미스터리’ 아닐까. 크림빵을 나누는 장면에서 아들에게 조금 주고 본인이 많이 가져가는 은하의 아이디어도 거기에 속한다. 아들한테 더 많이 줘야 한다는 선입관을 부수는 것. 백발이 성성한 아들과 젊어 보이는 어머니도 마찬가지. 어머니에 비해서 아들이 나이가 너무 들어 보이는데? 하는 불일치 혹은 그 미스터리로부터 상상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연습 중에 잠깐 얘기했지만 영화 <올드보이>에서 최민식은 이우진(유지태 역)을 원했다고 한다. 그 얘기를 들은 박찬욱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럼 오대수는 신구 선생님을 모셔 와야 돼요.” 같은 나이인 오대수와 이우진을 왜 나이 차가 꽤 나는 (늙은) 최민식과 (젊은) 유지태로 캐스팅 했을까. 영원히 소년에 머물러 있던 이우진을 표현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우리가 꼭 주입식 교육을 받아서가 아니라 혹은 이공계 일을 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일치되고 명백한 세계가 편한 법이다. 하지만 우리가 연기라는 예술을-이렇게까지 거창하게 얘기할 건 아니지만-하기로 했다면 불일치하고 미스터리한 세계를 받아들이겠다는데 동의한 거 아닐까.

생각해 보니 젊어 보이는 황정민 배우에 비해서 (매우 죄송하지만) 부인으로 생각되는 분은 꽤 나이가 들어 보였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내 또래라는 관점에서 생각하면, 부인은 제 나이로 보이는 것이고 황정민 배우가 유독 젊어 보이는 것이리라. 이런 걸 보면 우리가 사는 세계가 꼭 일치되고 명백한 건 아니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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