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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아닌데(14)

졸업생 공연연습

by 생각의 변화

1221 뉴페이스


한국에서는 좋아하는 사람이 결혼했다고 좋아하기를 중단합니까?

-<헤어질 결심>-


어머니는 열아홉에 결혼해서 스무 살에 형을 낳았다. 학부모 모임에 가면 대부분이 어머님과 띠동갑 정도의 나이차가 났으니 연세를 감안해도 굉장히 일찍 결혼한 편이다. 어머니가 그토록 일찍 결혼한 이유는 집, 구체적으로는 새아버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매일 집안에서 반복되는 고성의 욕설과 몸싸움. 최근에 들은 얘기인데 어머니는 외할머니가 재혼을 한 뒤 하루도 빠짐없이 악몽을 꾸었다. 당시에 어머니는 매일 밤마다 굶주린 늑대 같은 악몽에 쫓기면서 잠에서 깨어나기 일쑤였다고 한다. 하지만 놀랍게도 아버지와 결혼한 후로는 악몽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내가 아는 어떤 정신과 의사는 수면제를 처방받으러 오던 환자와 결혼했다. 전에는 이 이야기가 그냥 평범한 선남선녀의 만남과 결혼의 과정처럼 느껴졌는데, 어머니의 얘기를 듣고 나니 이들의 결혼도 ‘잠’과 연결되면서 어떤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된다. 잠이 누군가에겐 사랑이고 구원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 적어도 열아홉 살의 어머니에겐 그랬던 것 같다. <헤어질 결심>의 해준에겐 서래가 그랬던 것처럼.


다음 주 시파티를 앞두고 뉴페이스 두 명이 연습 장소에 나타났다. 특별출연을 부탁했던 선규(S)와 준용(J). 선규는 몸풀기와 발성부터 같이 한 후에 장면 연습하는 걸 유심히 지켜보았다. 한 시간 정도 후에 준용이 음료를 가지고 도착했을 때 낙근은 연습을 멈추고 선규에게 연습을 본 소감을 묻는다.

일단 예상보다 연습의 진도가 너무 빠르다. 자신의 예상은 대본 리딩을 하고 있을 정도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동선을 긋고 있어서 놀랐다. 움직임이 너무 기계적이고 감정이 없다. 동선 긋는 걸 서두르기보다는 충분한 리딩이 먼저다. 그리고 각각 배역들에 대한 코멘트를 했다. 어머니의 발성과 연기가 좋다. 여성적인 상상력을 이용해서(거울을 보거나 옷매무새를 다듬거나) 디테일을 만들어보라는 조언도 덧붙였다. 그리고 자신이 구상한 캐스팅과 차이가 있다고 했다. 조련사 성복, 의사 낙근, 형사 영환. 형사는 너무 엘리트 같고 조련사는 작품에서 요구하는 캐릭터에 비해서 너무 똑똑해 보여. 선규가 자신이 상상한 형사의 프로파일링을 쭉 읊고 난 후 연기 시범을 보였다. 건들건들 만사 귀찮은 듯, 건달인 듯 건달 아닌, 형사인 듯 형사 아닌 인물.


선규의 얘기가 끝나고 난 후 낙근은 특별출연과 관련된 이야기를 꽤 길게 설명한다. 그냥 순수하게 연습을 보러 온 준용이 조금 당황한 눈치다.

“준용이 생각은 어때?” 낙근이 묻는다.

“전 선규형이 정하면 그대로 따를게요.” 준용이 대답한다.

“그럼 결국, 형 어떻게 할 거에요?” 낙근이 선규를 보며 묻는다.

선규가 자신의 입장과 심정을 꽤 길게 설명한다. “준용이가 삼코하면 연출할게.” 선규가 말한다.

결국 내가 막연하게 상상하던 대로 모든 퍼즐이 완성된다. 완성? 이걸 완성이라고 할 수 있나. 연출이 바뀌었고 연출이 바뀌면 작품도 바꾸고 캐스팅도 바뀐다. 혹 작품이 바뀌지 않는다고 해도 캐스팅은 연출의 구상대로 가야 한다. 그러니 사실은 완성이 아니라 해체, 혹은 리셋이라고 봐야 하는 거 아닐까. 또 한 번, 계획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 계획대로 안 될 거라는 계획만 여전히 계획대로 되는 중. 뭔 소린지.


선규는 요즘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으면 사흘 안에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는 진기한 경험을 하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최근에 동기 모임을 앞두고 노래를 하기로 한 친구가 꿈에 자신은 모임에 못 간다고 하는 꿈을 꿨는데 실제로 그의 어머니가 심근경색으로 입원하는 바람에 모임에 못 오게 된 소름 돋는 경험을 했다고 한다.

“저번 주인가 지금 연기하면 어릴 때 하던 것보다 더 잘할 텐데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는데 며칠 후에 연극 같이 하자고 전화해서 완전 깜놀했다니까” 선규가 말한다. 이쯤 되면 작품을 <파묘>로 바꿔야 하는 거 아닐까.

우린 예정보다 일찍 연습을 마치고 헤어진다. 당분간 대본 리딩을 할 것이기 때문에 소품은 필요 없다고 한다. 역할을 바꿔가면서 리딩을 해 본 후에 캐스팅을 다시 하고, 인물 분석을 차근차근 한 후에 동선을 그을 거라고 대략적인 계획을 얘기한다. 어찌하다 보니 뉴페이스는 현 연출의 차를, 올드 페이스는 전 연출의 차를 타고 헤어진다.


차 안에서 은하가 낙근이 울 거 같다고 하면서 위로를 한다. 글쎄? 내가 보기엔 뭔가 마음의 짐을 덜어 낸 것 같은 표정인데. 사람은 모두 자기만의 방식으로 타인을 해석하기 때문에 무엇이 맞는지는 알 수 없다. 진심이야 낙근만이 알겠지. 어쩌면 자신도 잘 모르는지도. 낙근은 내가 뭔가 억울해 하는 듯한 말투나 톤이 조련사와 어울리는 것 같다고 했다. 반면에 선규는 내가 형사 역에 맞을 것 같다고 하면서 자신이 상상 속에서 프로파일링한 형사처럼 하루를 자기 맘 내키는 대로 보내는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 약간 마음을 들킨 것같은 조련사의 표정을 마지막 연기를 하듯 지어 본다.

사실 나는 억울해하는 사람이면서 남이 뭐라 말하든 내 방식대로 사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리고 가끔 욱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뜬금없이 심하게 흥분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두 사람 모두 나를 오랫동안 봐온 사람들이므로 내 안에는 그 모든 게, 조련사도 형사도, 있다. ‘그게 아닌데’ 가 아니라 ‘모두 맞는데’.


“요즘 계속 수면제 먹고 잤어.” 낙근이 나를 내려주면서 말한다.

연출하랴 연기 하랴 거기에 직장과 가정에서의 모든 일까지. 우리의 각성은 꺼지지 않고 쉽게 잠들지 못한다. 선규가 연출을 맡으면서 낙근에게 잠을 선사했기를 바란다. 잠은 휴식이면서 동시에 조금 거창하게 말하면 구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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