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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아닌데(13-1)

졸업생 공연 연습

by 생각의 변화

1214 특별출연


연출이 되면 결정해야 하는 게 백 가지 이상이다. ‘에이, 설마’ 라구? 그렇담 하나씩 따져보자. 작품 선정, 캐스팅과 같은 굵직굵직한 것부터 인물의 캐릭터와 동선, 무대 컨셉과 배치, 조명 위치와 종류, 딤인(dim in)인지 컷인(cut in)인지. 의상 컨셉과 색상, 분장도 배역별로 고민을 해야 하고 결국엔 하다하다 단역이 들고 나오는 소품의 색상까지 결정해 줘야 한다. 이렇게 되면 족히 백 가지는 훌쩍 넘는다.

결정과 함께 영혼의 단짝처럼 따라다니는 건 걱정이다. 연출이 되면 걱정을 달고 산다. 나는 연습이 끝나고 술 마시고 수다를 떠는 걸로 걱정을 해소했던 것 같다. 마실 사람이 없으면 혼자서라도.


낙근의 방법은 조금 특이했다. 낙근은 의과대학을 다니던 한때 종교(구체적인 종교명을 들었는데 잊어버렸다)에 심취해서 시험도 안 보고 전도를 하고 다녔다. 학창 시절 도서관 앞에서 담배를 피고 있으면 어느새 다가와 “얼굴빛이 참 좋으세요”라는 멘트를 날리던 이들과 비슷한 일들을 하고 다녔다는 것이다. 낙근이 연출을 하고 있을 당시에는 이미 그곳을 떠났을 때였지만 연극 연습이 끝나고 나면 매일 기숙사로 돌아가 건물 옥상에서 연극이 잘 되게 해달라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마치 기독교인이 하나님께 기도를 하듯.


요즘 낙근의 얼굴빛은 어둡다. 연습이 끝나고 나면 시작할 때 밝았던 빛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려서 “얼굴빛이 참 어두우세요”라는 전도용 멘트라도 건네고 싶은 심정이다. 이유는 하나. 연극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연기. 시간이 지나야 나아진다는 걸 알면서도 막상 연출의 입장에 놓이면 그 말만 철석같이 믿고 있기 힘들다. 더군다나 학생 때처럼 매일도 아니고 꼴랑 일주일에 한 번씩 연습해서 진짜 나아질까, 라는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본인이 직접 연기도 하고 있으니 ‘연습 시간 부족-대사 숙지 안됨-연기 지지부진’의 연쇄 반응이 가져올 필연적인 결과를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걱정 속에서 거론된 게 다섯 번째 배우, 이른바 단역 아니 특별출연이다. 동료와 삼코를 맡아 줄 다섯 번째 배우를 계획보다 빨리 알아보기로 했다. 비록 단역이긴 하지만 현재 인원들의 연기력 향상 속도와 그리 다르지 않을 거라고 보면 일찍 정해서 대본을 숙지시키고 분위기를 익히도록 하는 게 나중에 생길 수도 있는 치명적인 문제를 줄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대체 누구에게 말을 해본담. 결국 이러저러한 과정을 거쳐서 J와 S로 좁혀졌다. J는 내 일 년 후배이고 S는 낙근의 일 년 선배이다. J는 원래 질문도 많고 신중한 편인데 이번 역시 굉장히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연습을 한 번 보고 나서 결정하겠다는 것이다. 낙근은 여러 가지 점에서 S가 좀 더 낫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낙근의 연기를 봐주고(후배가 선배 연기를 봐주는 건 쉽지 않으니까) 코미디에 신선한 활력을 불어 넣는데는 아무래도 진지한 J보다는 유쾌한 S가 낫다고 본 것 같았다.

하지만 계획은 계획일뿐. 전에 내가 성복에게 얘기했던 ‘계획대로 되지 않아야 쓸 게 많아진다’는 더 이상 소망이 아닌 저주가 돼버린 내 망언처럼 이번 특별출연 건 역시 난항에 부딪쳤다. 둘 모두 이래저래 출연이 쉽지 않게 된 모양새다. 아아! 점점 더 쓸 게 더 많아지고 있는 중이다. 이제 그만! 다음엔 모든 게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길. 금기어로 정해버리든지 해야지 이거야 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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