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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아닌데(12-2)

졸업생 공연 연습

by 생각의 변화

1207 과유불급


약속이 있어서 못 나온 은하를 제외한 세 명이 일주일 후에 만나서 연습을 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낙근은 저번에 봤을 때보다 표정이 밝고 좀 더 여유가 있어 보인다. 연습을 시작하기 전이어서 그런 건가. 오늘은 낙근이 가져온 첨단장비(?)인 핸드폰 삼각대를 이용해 보기로 한다. 주로 셋이 나오는 장면에서 녹화를 하고 녹화 영상을 보면서 피드백을 하는 것이다. 약간 영화 만드는 과정과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여전히 우린 모두 어정쩡한 상태에서 지극히 ‘과유불급’스러운 얌전하고 아무 특색 없는 연기를 하고 있다. 토요일에 연습했던 ‘은밀한’ 장면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간다. 괜히 ‘마조히즘’ 장면도 불안해진다.

“성복아, 평소에 말할 때처럼 할 수 없을까? 평소에는 무대에서 연기하는 것처럼 그렇게 하지는 않잖아.” 낙근이 매번 연습때마다 지적하는 같은 내용을 지적 중이다. 조금 달라진 게 있다면 예전보다는 말투가 좀 더 부드러워졌다는 거? 아마도 본인의 말처럼 직접 ‘형사’ 연기를 해보니 맘처럼 쉽게 되지 않는다는 것을 몸소 깨닫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이게 대체 왜 안 될까, 연출을 하다 보면 백번도 넘게 드는 생각이지만 막상 해보면 그렇지 않다는 걸 금방 알게 된다. 이게 연극을 위해서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배우의 맘을 ‘이해’하게 된다는 면에서는 좋은 일이다.


“<지킴이> 영상을 봤는데 그때 연기는 아주 잘 만들었던데.” 낙근이 말한다.

“그때는 대사도 많지 않으니까 그냥 막 만들면 됐는데. 지금은 대사도 많고 그렇다고 막 이런 식으로 해버릴 순 없잖아요?” 성복이 갑자기 표정이 돌변하고 얼굴이 시뻘게지더니 만화 속에 나오는 사이코 과학자 같은 캐릭터로 둔갑하여 방언이 터진 ‘의사’를 연기하며 속사포로 대사를 발사한다. 낙근의 눈빛이 뭔가 살짝 변한다. 속으로 ‘오~ 이 캐릭터도 괜찮은데’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낙근의 눈빛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어 그냥 잠자코 있는다.

계획대로 못 할 거라는 예상을 깨고 오늘 연습의 마지막인 ‘마조히즘’ 장면에 드디어 도달한다. 우린 최선을 다해 문지르고 느끼고 신음소리를 내며 연기를 한다. 결국엔 낙근이 웃음이 터지고 나랑 성복이도 웃음을 터트린다. 낙근의 표정이 조금 밝아지고 몇 가지 동작들의 큐를 조정한다.


“이 연극이 될까?” 연습을 마치고 돌아가는 차 안에서 낙근이 말한다. 예전의 걱정 모드로 돌아가 있다.

“원래 시간이 좀 걸리잖아요.” 내가 자신없이 대답한다. 집 근처에 거의 왔을 때 낙근이 <지킴이>에서 성복이 한 연기를 다시 언급한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난 듯 묻는다. “근데 아까 성복이 보여준 그 괴팍한 의사 괜찮지 않니?”

“저도 그거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적어도 지금 하고 있는 어정쩡한 캐릭터 보다는 훨씬 나을 것 같아요.” 낙근은 조금 표정이 밝아지면서 그걸로 한 번 만들어 보자고 한다. 다음 연습은 연출이 없어서 우리끼리 만들어볼 생각을 하니 조금 설렌다. 집에 도착해서 성복과 통화를 하고 괴팍한 의사로 만들어 보자고 하니 뭔가 재미있어 하는 눈치다.

과유불급, 성복이 보여준 아주 많이 과장된 괴팍한 캐릭터를 생각하니 한 번 더 쓸모 없다는 생각을 한다. 그럴 수밖에, 우린 논어의 세계관이 아니라 코미디의 세계관 속에서 살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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