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인들은 인간의 운명은 두 가지라고 생각했다. 하나는 ‘모이라이‘(Moirai)적 운명, 다른 하나는 ’ 다이몬‘(Daimon)적 운명이었다. ’ 모이라이‘는 신화에 등장하는 운명의 여신들이다. ’ 모이라이‘의 끝소리 ’이‘는 복수형 어미였다. 즉 ’ 모이라들‘이라는 뜻인데 그들은 세 명의 자매들이었다. 맨 위의 큰 언니는 운명의 실을 잣고, 둘째는 그것을 사람들에게 맞추어 자르고, 셋째는 그것을 주인들에게 나누어준다. 모이라이적 운명은 결국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나는 ’숙명’(宿命)이다. 한편 ‘다이몬’적 운명에서 ‘다이몬’은 귀신이나 악령을 가리키는 영어 ‘데몬’(demon)의 어원이다. ‘다이몬’적 운명이란 한 마디로 ‘내 안의 무언가가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비극적인 어딘가로 이끌어가는’ 운명이다.
서양 사람들은 사랑을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하긴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누군가를 만나 마음을 나누는 인연이야 말로 운명 외에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 운명적 사랑들 가운데에서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비극적 사랑에는 ‘다이몬’이 개입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각각 ‘몬태규’와 ‘카퓰렛’이라는 원수 집안의 아들과 딸로 태어난 것은 ‘모이라이‘적 운명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우연히 무도회에서 만나 사랑에 빠지고 그로 인해 결국 비극적 죽음을 맞게 되는 것은 ’ 다이몬‘적 운명이었던 것이다.
문학 작품 속에 표현되어온 수많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들’은 결국 다이몬이 조작한 ‘운명의 장난’들인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희곡작가 에우리피데스(Euripides)의 작품에 ‘히폴리투스’라는 것이 있다. 작은 왕국의 왕자였던 히폴리투스는 어린 시절 어머니를 여의였고, 그 나라의 왕비 자리는 오랫동안 비어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왕은 한 아름다운 여성을 궁으로 데리고 들어온다. 그녀의 이름은 ‘패드라’였다. 그녀는 남편의 아들인 히폴리투스를 보는 순간 사랑에 빠진다. 다이몬적 운명의 희생자가 된 그녀는 결국 의붓아들 히폴리투스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들키게 된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아들은 새어머니에 대해 극도의 혐오와 경멸감을 드러낸다. 수치심과 원망에 사로잡힌 패드라는 남편이 궁을 비운 사이 독약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리고 남편에게 한 장의 유서를 남긴다. ‘당신의 아들로 인해 나는 더 이상 당신의 아내일 수 없습니다.‘라는 내용이었다. 아내의 유서를 본 왕은 자신의 아들이 새어머니를 겁탈한 것으로 오해한다. 차마 자식을 죽일 수 없었던 그는 아들을 영원히 궁에서 추방한다. 궁을 나온 히폴리투스는 달리던 마차가 뒤집어져 결국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다. 그렇게 패드라는 흔히 말하는 ’ 팜므파탈‘(femme fatale)의 원형이 되었던 것이다.
다이몬적 운명의 희생자는 도처에 있다.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잃은 패드라처럼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문학 속 비극의 주인공이 되는 사례는 수없이 많다. 사랑하는 아내의 정숙함을 의심해 목 졸라 죽이는 오셀로, 12살 어린아이와 패륜적인 성애에 빠진 ‘롤리타’(Lolita)의 험버트, 자신의 사랑을 배신한 남편에 대한 복수를 위해 두 아들을 살해한 메데아... 비극적 사랑에는 ‘악령’만이 존재하는 것인가.
인간은 자유롭기 위해 태어난 존재이다. 하지만 그 자유 앞에서 우리는 두려움을 느낀다. 그래서 스스로 그 자유로부터 도피하기도 한다. 패드라는 현대의 자유분방한 다이몬적 사랑에 빠진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다만 오늘의 패드라는 결코 독약을 마시지 않는다. 이루어질 수 없으나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운명의 수레바퀴처럼 사랑도 움직이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오늘날 다이몬에 의해 파괴되는 것은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가 믿고 지켜온 수많은 금기(禁忌)들만이 다이몬 앞에서 눈물짓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