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생각에 입히는 옷이지요. 떠오르는 수많은 생각들이 입으로, 손으로 표현될 때 그것들은 어느새 언어라는 옷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언어가 없다면 생각은 찰나를 넘기기 어려울 것이고, 그 생각들로 이루어지는 세계는 무채색의 뿌연 연기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19세기 구조주의 언어학자들은 언어가 세계를 구성한다고 말했지요. 그저 있는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만들어낸다고 말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물었습니다. 일 년에 계절이 몇 개가 있냐고. ‘네 개’라는 대답에 그들은 그것 보라는 듯이 빙긋이 미소 짓곤 했을 겁니다. 사실 한 해에 계절이 네 개만 있으리라는 법이 어디에 있던가요. 우리가 네 개의 계절을 인식하는 것은 계절을 나타내는 언어가 봄, 여름, 가을, 겨울, 넷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대신 절기(節氣)는 스물넷이나 되고 무지개 빛깔도 일곱 개는 되지요. 그렇게 세상을 구성하는 언어는 생각의 옷이고, 또 누군가의 표현처럼 생각의 집이기도 한 겁니다.
브런치 작가님들의 글을 읽다 보면 생각에 입히는 글이란 옷이 너무도 다양함을 느끼게 되지요. 어떤 글은 베옷처럼 거칠면서도 서늘한 쾌적함을 주고, 또 어떤 글은 실크처럼 부드러워 온몸을 휘감기도 합니다. 가끔은 정장 차림처럼 단정하고, 어떤 때는 캐주얼처럼 느슨하고 편하지요. 찬란한 색채로 오감을 휘젓다가 단아한 몇 가지 색으로 마음을 위로합니다. 시로, 수필로, 소설로 그냥 붓 가는 대로 자유로이 그려지는 그 단어들의 유희! 언어는 그렇게 여러 가지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납니다.
사람에게는 자신만의 모습이 있듯이 자신만의 ‘글 모습’이 있죠. 어떤 때는 소박하게, 때론 현란하게, 가끔 현학적이다가 불현듯 감상에 빠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듯 감정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글 속에 쓰는 사람의 모습이 보이죠. ‘아! 외롭구나...’ ‘무척 행복했나 보네!...’ ‘와, 너무 관대한데...’ ‘왜 이리 냉소적이지?...’ 수없이 만나는 수많은 글 모습 속에서 그것에 자신만의 옷을 입힌 작가들의 모습이 그려지기도 합니다.
글은 말보다 솔직하지 못할 때가 많다고 합니다. 말은 내뱉으면 주워 담을 수 없지만 글은 고치고 바꾸고 꾸며댈 수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글 속의 그 꾸밈과 비틀림마저도 글 쓴 이를 보여주고 있지요. 그것이 글 속에 고스란히 드러나기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인격(人格)이 있듯이 글에는 글 격(格)이 있기 마련이죠. 언어는 더 고상하거나 비천한 것이 없습니다. 언어는 그저 하나의 기호이기 때문입니다. 언어는 임의적(任意的, arbitrary)으로 만들어진 것이죠. 그냥 제일 먼저 만든 사람 마음대로 말입니다. ‘하늘’을 하늘이라 부르는데 무슨 이유가 있나요. 서로 약속한 것입니다. 빨간 불에는 정지하라고 정한 것과 같은 것이죠. 그래서 언어는 제 혼자서 움직이거나 무언가를 행할 수 없는 ‘사물’ 일뿐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집어 들어 사용할 때만 살아나는 것이죠. 그래서 언어는 사용자의 모습에 따라 제 모습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저는 브런치 공간을 통해 우리나라 시인들의 시를 사백 편 이상 영어로 번역을 했습니다. 그 끝에 소박한 감상을 붙이기도 했고요. 그랬더니 가끔 내게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아마도 내가 나이가 많아서 새로 나온 AI를 모른다고 생각해서 인 것 같아요. 그들의 말 : “요즘에는 AI가 시를 영어로 완벽하게 번역한다네. 굳이 힘들게 영역하려 할 필요가 없어!” 나는 짐짓 처음 알았다는 듯이 이렇게 말하죠. “그래? 아 이런 헛수고를 했네. 그럼 이젠 위대한 한국 시인의 작품들을 모두 외국어로 옮겨 세상에 내놓을 수가 있겠어! 곧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나오게 되겠는 걸!”
사실 난 AI로 번역된 시나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잘했더군요. 문법도 단어의 선택도 예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훌륭했죠. 간혹 “내 번역보다 나은 거 아냐?”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으니까요. 흐흐. (공든 탑 무너지는 소리...) 요즘에 로봇이 시도 쓰고, 논문도 쓰고, 연설문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별 짓 다한다고 하더군요. 사람이 시키기만 하면 밤이고 낮이고 싫다는 소리 한마디 없이. 그렇게 몇 개 만들어 놓고 스스로 대견스러워하는 분도 계신다고 들었어요. 나보다 훌륭한 일을 하고 집에 돌아온 장성한 자식을 보는 기분으로 말입니다.
한편으로 걱정하는 분도 많으시더군요. 이제 명령어 몇 개면 전공 불문, 연령 혹은 성별 불문 최소한 망신당하지 않을 정도의 글은 만들어 낼 수 있으니 말입니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예술은 무너지고 말았죠. 문학도 미술도 음악도 이젠 더 이상 예술가라 불리던 사람들이 필요 없으니 말입니다. 기계가 만들어 놓은 시를 읽으며 기계가 만든 음악을 듣고 기계가 그린 그림에 감탄할 수 있게 된 것이니까요. 그런 세상이 공상과학 소설 속에서가 아니고 바로 지금 내 옆에 존재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놀라운 발명품들에게 좀 더 일찍 적응하고 사용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모양입니다. 늘 얼리 어댑터(early adaptor)들이 있기 마련이니까요. 한 번은 공대 교수를 했던 한 친구가 AI가 만든 영문 논문 요약본을 들고 왔습니다. 늘 내게 영문을 부탁하던 친구였는데 이번엔 다른 친구가 생긴 것이죠. 그런데 아직 그 친구를 다 믿지는 못했던 것 같아요. 내게 제대로 됐는지 보아달라고 말하더군요. 나는 그 글을 읽으며 말했어요. “이거 뭐. 완벽하네. 이젠 내가 필요 없게 되었어!” 아 그리고 보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 친구의 그 흡족해하는 표정을 말입니다!
4차 혁명의 시대에 인간은 이제 자신을 대신해 일해 줄 친구들을 다수 확보하게 되었더군요. ‘DNA 구조에 대한 새로운 학설들을 요약해 줘. “ ”마음이 울적할 때 들을 수 있는 음악을 만들어 봐. “ ”애인이 눈물 흘릴 만큼 감동적인 편지를 한 통 만들어서 카톡으로 그녀에게 보내줘. 물론 내 이름으로. “ 이거 뭐 우린 뭘 하고 놀아야 할지 걱정이네요. 로봇들이 사람의 인력을 대신해서 직업을 잃는다 해도 걱정할 일은 없어요. 누군가가 나타나서 로봇으로 번 돈을 놀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날이 멀지 않았으니까요.
마르셀 뒤상
그런데 혹시 AI로 브런치에 글 올리시는 분들은 안 계시죠? 설마요. 아무튼 ‘내 손으로 글은 왜 쓰지?’하는 걱정은 마세요. 화장실 변기를 뜯어내 사인을 하면 그것이 예술품이 되는 시대랍니다. 20세기 현대미술의 거두였던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이 그렇게 만들었지요. 중요한 것은 사인이에요. 나의 것, 나의 생각이라는 증거! 변기만으로는 충족시킬 수 없는 그것. 그런데 사인 정도가 아니고 직접 손으로 쓴 글, 그것도 새벽의 그 귀한 시간에 잠도 자지 않고 번뇌 속에 완성한 글, 그것보다 완벽한 나의 것의 증거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으니까요.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내 것은, 내가 만들고 사인하고, 스스로 만족했던 혹은 부끄러워했던 모든 것들은 여전히 나만의 것이라 생각하렵니다. AI 그건 모든 사람들의 것일 뿐이잖아요. 이제 곧 ‘나만의 것’이 귀중한 시간이 다시 올 겁니다. 그러니 걱정 마세요. 나도 그냥, 여전히 아름다운 우리의 시를 영어로 옮길 겁니다. 저는 평생 영어로 호구지책을 세웠던 사람이거든요.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저만의 것을 계속하려고요. 나의 지문과, 땀방울과, 사인과 사연이 담긴 나의 글, 나만의 언어를 찾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