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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문으로 가벼워진 마음

by 최용훈

살아가면서 몇 가지 깨닫게 된 것들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들을 언제나 기억하고 있거나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알고 있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안의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었던 그 많은 인식과 개념들이 오늘의 나를 존재하게 한 것이고, 내일의 나를 이끌어 갈 것임을 새삼 느끼게 된다. 그리고 수많은 이론과 용어와 관념 속에 살아온 지난 세월이 결코 오늘의 내 현실이 아님을 보았기에 몇 가지 상념을 그저 넋두리처럼 풀어놓으려 한다.


1. 과거는 바꿀 수 없다.


이미 지나간 모든 것은 결코 되돌리거나 바꿀 수 없다. 부모님과 함께 행복했던 어린 시절은 이제 다시 올 수 없다. 마찬가지로 내가 했던 수많은 행동과 말들 역시 이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것들로 어떤 이들은 감동했을 수도 있지만 다른 이들은 분노와 혐오의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가끔은 그 감정들을 내가 알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나 역시 모르고 지내왔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이제와 어쩌겠는가. 이젠 사과도 변명도 고마움의 표현도 어렵다. 이미 지나간 것을 돌아보는 것은 그림자를 잡으려 손을 내젓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잊고 살아야지. 굳이 떠올려 소름 끼치는 자괴와 회한을 겪을 일은 아닌 것 같다.


2. 모든 이들은 자신들의 삶을 살아간다.


어찌 이것을 몰랐을까? 나 자신은 누구보다도 자유로이 제 삶을 살았으면서도 왜 남들 역시 똑같은 자유로움을 누리고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했을까? 여기서 자유라 함은 고통과 환난의 선택 역시 자유롭다는 의미에서의 자유이다. 몇십 년 만에 알게 된 조카 녀석이 온몸에 문신을 한 것을 보고, ‘그것만 없으면 뭔가 될 듯싶은데...’라고 느끼는 것은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그 아이의 삶에 아무런 영향도 미친 적 없으면서도 새삼 무얼 그리 잘 되길 바라 문신을 탓하는 것인가! 제 몸에 그림을 새기는 것 역시 그의 삶일 진데 무얼 굳이 참견하려 드는 것인가! 수십 년을 알고 지낸 친구와 동료들도 마찬가지. 내가 누구의 인생을 책임질 수 없고, 삶의 끝에 결국은 혼자의 몸으로 떠날 것임을 아는데 새삼 미련을 갖거나, 안쓰러워할 일도 아니다. 시쳇말로 너나 잘하면 되는 것이다.



3. 생각이 깊으면 슬픔만 많아진다.


너무 생각하지 말자. 생각은 제 아무리 잘 준비되어도 걱정을 낳고, 불안을 낳고 결국 슬픔을 낳을 뿐이다. 본질이 아닌 생각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얄팍한 생각에 빠져 그릇된 판단을 내리고 현실을 도외시한 결론에 부딪혀 함몰하는 모습을 흔히 보아오지 않았는가. 생각보다는 순간의 느낌을 더 중요시 하자. 이성과 논리를 지나치게 내세우기보다는 직관과 감정의 진실을 더욱 신뢰하는 것이 어떨까? 생각 많은, 복잡하고 지루한 소설---재미있는 소설은 예외다---보다는 쌈빡하게 가슴을 헤집는 한 편의 시가 더 매력적이니 말이다.


4. 행복은 내 안에 있다.


긍정적인 생각은 긍정적인 결과를 낳는다. 내 속의 행복을 찾기 때문이다. 불행한 자가 어찌 긍정적인 생각을 할 수 있을 터인가. 그러니 웃자. 행복해서 웃고, 행복해지려고 웃고, 행복하지 못해서 웃자. 행복은 어차피 찰나에 있는 것. 평생을 행복한 사람은 아마도 바보이거나 지독한 위선자일 뿐이다. 사형대에 묶인 죄수가 죽기 전 5분간에 가졌던 느낌은 그 짧은 시간이 무한으로 확장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잠시의 행복으로 우리가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이다. 다른 곳에서 행복을 찾지 말자. 결국 내 마음은 내가 선택하는 것이고, 행복도 내 선택일 뿐이다. 새벽 동트기 직전 바닷가 보드워크를 걸어보라. 머리를 비우고 새벽의 서늘함과 멀리서 다가오는 옅은 태양빛과 부지런한 새들과 벌레들의 합창에 기울여 보라. 그것이 내 안에 있는 행복이 아니더냐.


5.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누군들 모르랴. 가만히 누워서 달리기를 열망할 수 없음을. 베푼 것 하나 없이 받으려는 자는 또한 얼마나 어리석은가! 그러니 콩 심어 놓고 팥 나길 기다리지 말자. 어차피 심은 대로 거두는 것, 굳이 심지 않은 것에 기대와 미련은 두지 말자. 자식이 누구 보고 크나. 내 자식이 변변찮으면 내 잘못이지 누구를 탓하겠는가. 내 벗이 나를 버린다면 그게 내 탓이지 어찌 벗의 탓인가. 심은 대로 거두겠다는 농부의 마음은 결국 모든 것을 내 탓으로 돌릴 줄 아는 현명함이다. 농부는 팥을 원한다면 이듬해 팥을 심을 것이요, 과일을 원한다면 과일나무를 심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내가 해야 하는 일이다. 못했다면 그것은 누구의 탓도 아니다. 오직 내 탓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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