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용훈 Sep 03. 2024

나는(너는) 왜 그렇게 생각하지?

우리는 삶을 내가 주인공이 되는 영화 같이 생각한다. 당연하다. 내 인생의 주역은 나니까. 내가 하는 일이 그저 남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일이라 해도 인생의 카메라는 언제나 렌즈의 초점을 ‘나’에게 맞추고 있다. 스포트라이트는 내 머리 위에서 비추고 있는 것이다. 나를 나보다 더 잘 이해하는 사람이 있을까? 부모도 형제도 가까운 친구도 내 마음을 나처럼 들여다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말로 설명하는 데도 한계가 있다. 본래 언어라는 것은 불확실한 것이어서 자신의 뜻을 백 퍼센트 상대에게 전달할 수 없는 법이다. 그래서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데...’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땐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낫다. 자신이 뜻을 온전히 전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할 때는 더욱.


그래서 우리는 자기중심적이 된다. 적어도 생각의 과정에서는 말이다. 우리의 뇌는 결정을 내리거나 판단할 때 빠르고 쉬운 길을 선호한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우리처럼 생각하거나 같은 관점을 갖고 있으리라 가정하는 것이 다른 관점에서 보기 위해 노력하는 것보다 빠르고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필연적으로 ‘편견’을 수반한다. 이른바 ‘자기중심적 편견’(Egocentric bias)이다.     


자기중심적 편견은 모든 것을 자신만의 관점에 고착시키는 경향을 가리킨다. 이러한 편견은 현실에 대한 왜곡을 초래하여 다른 사람의 관점이나 감정을 인식하기 어렵게 만든다. 예를 들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연설을 할 때, 우리는 흔히 긴장하게 된다. 목소리가 떨리거나 행동이 자연스럽지 못하다고 스스로 판단한다. 그래서 남들이 그것을 눈치챘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많은 경우 상대방은 그것을 별로 의식하지 못한다. 자신만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더 많은 긴장과 스트레스를 겪게 될 가능성이 커진다. 그렇듯 자기중심적 편견은 자신의 불안감에 집중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상황을 파악하는데 실패하게 만드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편견은 자신의 말과 행동에 대한 과대평가로 드러나기도 한다. 스스로에게 도취되어 자신이 상대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심지어 감동을 주었으리라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우리에게 그다지 큰 공감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겉으로 동의를 표하고 감탄하는 것처럼 보여도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그런 것 말이다.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 누군가에게 진정으로 공감하고 그것을 마음에 새기는 일은 현실에서 좀처럼 이루어지기 힘들다. 우리만큼 남들도 그들의 관점을 강하게 지니고 있음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다른 누구보다도 자신에 대한 정보를 더 많이 갖는다. 따라서 우리의 내적 생각이나 감정과 같은 정보에 손쉽게 접근한다. 하지만 자신에 관한 정보는 판단에 부적절한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너무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친구에게 조언을 하거나 위로를 전할 때에도 우리는 자신의 입장에게 말하기 쉽다. 상대의 관점이나 감정, 관점을 도외시하고 여전히 자기중심적 편견에 따르는 것이다.


자기중심적 편견은 지나치게 자신을 중심에 놓게 됨으로써 문제가 된다. 즉 우리의 영향력이나 중요성을 실제보다 훨씬 크게 생각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이로써 자기중심적 편견은 이기적이 되기 쉽고 실제와는 달리 타인도 자신의 생각에 동의하고 있다는 착각을 초래하기도 한다. 그것은 다른 사람과의 공감을 방해하고, 종종 다른 사람의 감정이나 생각을 완전히 무시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지식의 저주’라는 말이 있다. 이는 지식이나 전문성을 지닌 이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쉽게 소통하지 못하거나 그들을 이해시키는데 실패하는 것을 일컫는다. 학생들의 수준을 무시한 교사, 전문적인 용어로 고객에게 상품을 설명하는 영업 사원,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에게 보이는 힘 있고 많이 가진 자들의 몰이해의 위로와 동정... 우리 주변에서 수없이 벌어지는 터무니없는 일들은 자기중심적 편견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자기중심적 편견은 자신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일상화됨으로써 극복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그것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모든 사람들은 어느 정도 편견을 갖고 있음을 인정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과 거리를 두는 언어’(self-distancing language)를 사용하라고 제안한다. 즉 자신을 이인칭 ‘당신’ 혹은 자신의 이름으로 불러보는 것이다. ‘내가 왜 이렇게 생각하고 있지?’ 대신에 ‘너는 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자신의 편견과 독단적인 판단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한 가지 방법이다. 덧붙여 무의식적이고 즉흥적인 결정이나 판단을 피하고 좀 더 분석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신의 결정이 가져올 결과를 떠올리거나 생각의 속도를 줄이고 대안을 생각해 보는 것은 자기중심적인 편견에서 벗어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한다.


인간은 원래 자기중심적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자아가 없는 사람이 있으면 데려와 봐요. 그는 틀림없이 패배자일 테니.” 건강한 자아는 삶의 필수적인 자양분이다. 문제는 자기중심적인 관점으로 모든 것을 보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18/40/60 행복의 법칙’이라는 얘기가 있다. “열여덟 살에는 남이 나를 어찌 생각하는지를 중시하고, 마흔에는 남들의 생각에 무심해지는 법을 배우고, 육십에는 아무도 그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것.” 세월이 주는 지혜 중의 하나는 남들의 생각에 크게 개의치 말라는 것이다. 비극이든 희극이든 자신이 생의 주인공임을 깨닫는 것이다. 하지만 자기중심적인 편견에 빠져 사는 것은 자신만이 아니라 남에게도 상처를 줄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역지사지’(易地思之) 하자.  

매거진의 이전글 자기 연민의 두 얼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