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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훈 Sep 04. 2024

무엇이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가?

영국 태생의 미국 시인 오든(W.H. Auden, 1907-1973)은 1947년 책 한 권 분량의 장시(長詩) ‘불안의 시대’(The Age of Anxiety)를 출간하였다. 2차 세계대전의 암울함 속에서 그의 시 마지막 연에는 변화와 환상에 대한 두려움과 죽음에 대한 이러한 표현이 나온다.


“우리는 변화되기보다는 파괴되는 것이 낫다.

 변화의 순간을 만드는 십자가에 올라

 우리의 환상을 죽게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두려움 속에서 죽는 것이 낫다. “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까? 이렇듯 불안과 두려움 속에 사느니 세상으로부터 사라지는 것이 나을까? 우리의 삶은 그러한 절규에 어울리는 불안의 순간들로 점철되어 있다.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불안감의 근원은 어디일까? 독일의 신학자이자 루터교 목사였던 폴 틸리히(Paul Johannes Tillich)는 자신의 저서 ‘존재의 용기’(The Courage to Be)에서 불안을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눈다. 첫째, 존재론적 불안, 둘째, 도덕적 불안, 셋째, 정신적 불안.


우리는 늘 설명할 수 없는 감정에 쫓기며 산다. 무엇일까? 무엇이 늘 우리의 가슴 한 구석에 가시지 않는 불안과 두려움을 심어놓는 것일까?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다. 누구도 그 존재의 종말, 죽음을 피해 갈 수 없다. 결국은 먼지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 아닌가? 하지만 세속의 삶이 주는 달콤한 쾌락과 고통을 겪어온 우리는 삶의 끝을 결코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자신의 죽음이나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불안하다. 보이지 않는 그것이 늘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개똥밭을 굴러도 이승이 낫다 했던가? “ 그래서 더럽고 추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가? 프로이트가 말한 '생의 욕구''죽음의 욕구'를 앞서는가? 생존에의 욕구는 본능적으로 죽음에 대한 혐오로 이어지는가?


내일을 알 수 없는 인간의 나약함과 무력함은 우리를 불안의 나락으로 내몰아간다.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길 수 있을까? 벗어날 수 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에 허우적거리며 우리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피할 수 없는 불안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그것이 존재론적 불안이다.


2차 대전 후 유럽을 지배했던 실존주의 철학은 수많은 사람들이 벌레들처럼 죽어가는 것을 목도한 유럽인들의 허망한 감정 속에서 등장하였다. 2,000년 동안 양인들의 마음속에 있던 명제는 ‘본질은 실존에 앞선다’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하나님이 부여한 본질을 지닌 채 실존의 모습으로 태어난다는 것, 그것이 기독교 사상을 오랜 세월 유지했던 유럽인들의 믿음이었다. 그러나 고귀한 인간의 생명, 하나님이 부여한 인간의 목숨이 너무도 허망하고 부질없는 것임을 깨닫는 순간, 그들은 깊은 회의를 품게 된다. 그리하여 그 오랜 명제를 뒤집는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 우리는 아무런 본질의 규정 없이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thrown-out being) 일뿐이었다. 그리고 시시포스처럼 언덕 위로 바위를 올렸다가 다시 아래로 밀어버리는 무의미한 행위를 계속한다. 즉 있지도 않은 자신의 본질을 찾아 헤매는 것이다. 그렇듯 ‘부조리’한 세상에 살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본질에 대한 부정, 부조리한 헛된 노력 그리고 그 죽음은 종말이라는 의식. 자신의 운명에 대한 불확실성, 그 모든 것이 존재론적 불안을 만든다. 그것은 헤어 나올 수 없는 수렁과도 같다. 벗어날 길이 없는 영원한 아포리아. 그렇게 우리는 설명하기 어려운, 그림자 같은 우리의 존재에 대해 불안해하는 것이다.


도덕적 불안 역시 우리의 삶에서 결코 떼어 놓을 수 없는 업보와 같은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누구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 홀로 떠있는 섬일 수 없다. 그리고 그러한 공동체 안에는 누구나 지켜야 할 규범과 도덕이 있다. 하지만 인간은 늘 불완전한 존재이고, 여러 가지 약점을 지니고 있다. 고대 그리스어 ‘하마르티아’(hamartia)는 ‘과녁을 빗나가다’ 혹은 ‘잘못을 저지르다’라는 어원을 갖는 단어이다. 이는 고대 그리스의 비극 작품들과 관련해 인간의 '성격적 ‘결함’을 의미하게 되었다. 즉 인간이 불행과 비극을 겪게 되는 내적 결함, 달리 표현하여 비극적 결함을 말한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맥베스’의 주인공 맥베스 장군은 마녀들의 예언에 현혹되어 왕의 자리를 꿈꾼다. 결국 왕을 시해하고 스스로 권좌에 앉았으나 그는 깊은 죄의식과 불안 속에 결국 몰락한다. 인간의 마음속에 자리한 탐욕의 결함, 유혹에 빠지기 쉬운 나약함, 그것이 바로 ‘하마르티아’이다.


“우리는 백 개의 가면을 들고 다닌다.” 독일의 심리학자 카를 융(Carl Gustav Jung)의 말이다. 무수한 가면을 들고 다니다가 필요한 경우 그에 알맞은 가면을 쓴다. 물론 그것은 부정적인 표현만은 아니다. 자신이 수행해야 할 다양한 역할에 따라 부모, 자식, 상사, 부하, 직업, 희로애락의 감정까지 여러 가지 가면을 쓰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탐욕, 위선, 의심, 허위 등 무수한 하마르티아를 자비, 정직, 믿음, 미덕의 가면으로 감추기도 한다. 그러한 가면으로 자신을 숨기는 사람은 의식하든 못하든 자신에 대한 죄의식을 지닐 수밖에 없다. 자신에 대한 믿음을 상실하고 속과 다른 자신의 겉모습에 불안감을 느낀다. 그것이 이른바 ‘가면 효과’이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 대부분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 사회가, 타인이 믿고 있는 그의 모습과 다른 자아를 발견하는 순간 자신에 대한 경멸과 함께 불안감을 느낀다. 이것이 도덕적 불안이다. 결코 벗어날 수 없는 불안감, 그것은 바로 스스로의 이중성에 대한 회의이며 죄의식이다. “신은 우리에게 하나의 얼굴을 주셨으나 우리가 하나를 더 만든다. “라고 한다. 우리의 진짜 얼굴을 감추는 위선의 모습이 스스로에 대한 불안을 낳게 되는 것이다. 미국 시인 셸 실버스타인(Shel Silverstein)이 쓴 ‘나의 또 다른 얼굴’(Underface)이라는 짧은 시를 소개한다.  


내 진짜 얼굴 아래에는

아무도 볼 수 없는 얼굴이 하나 있어요.

덜 미소 짓고

덜 확실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더 나와 닮았지요.


때론 내 진짜 얼굴과 가면이 구분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불확실한 자신의 모습에 우리는 불안감을 느낀다. 언제 어떤 얼굴로 돌아볼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겪는 또 하나의 불안은 ‘정신적 불안’이다. 아노미(anomie)라는 심리학 용어가 있다. 사회적 혼란으로 인해 규범이 사라지고 가치관이 붕괴되면서 나타나는 사회적, 개인적 불안정 상태를 뜻하는 말이다. 아노미 상태에 빠지면 삶의 가치와 목적의식을 잃고, 심한 무력감과 자포자기에 빠지며 심하면 자살까지 하게 되는 현상이 발생한다. 사실 이러한 정신의 혼란 상태는 꼭 사회적, 개인적 불안정에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내재화된 존재론적 불안이 개인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것은 도덕적 불안이 초래하는 자아에 대한 믿음의 상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현대인들은 엄청난 스트레스 속에 살아간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과 관련된 스트레스는 단연 압도적이다. 아침부터 밤까지 죽어라 하고 일해도 형편이 나아지지 않는다. 정신적 불안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지만 그 원인은 사회적이며 도덕적이고 존재론적인 것이기도 하다.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Albert Camus)는 인간이 부조리함을 느끼는 순간을 네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기계적인 삶이 초래하는 단조로움과 권태’이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정해진 루틴에 의해 살아간다. 아침에 일어나 출근을 하고, 일하고 퇴근하면 벌써 하루해가 저문다. 봄의 향기로운 꽃들, 여름의 바다, 가을의 공원 벤치, 겨울의 눈 쌓인 숲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한다. 지친 몸을 이끌고 휴일이면 아이들과 함께 놀이공원에라도 가야 하고 일 년에 며칠 안 되는 휴가 중에는 몇 시간씩 걸려 사람들로 버글대는 해수욕장에도 가야 한다. 잠시라도 자신만의 시간을 내기 어렵다. 거기에 무슨 휴식과 낭만과 사색이 있을 수 있는가? 삶은 그저 단조롭고 견디기 힘든 권태로 가득하다. 사는 것이 부조리하고 무의미하고 고통스러울 뿐이다. 둘째가 시간에 의해 모든 것이 파괴된다는 생각이다. 세월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몸도 마음도 예전과 같지 않다. 퇴직은 노후의 한가로운 삶이 아니라 더 큰 권태와 관계의 단절을 의미할 뿐이다. 셋째, 소통의 부재이다. 가정 안에서도 사회에서도 자신의 마음을 전할 길이 없다. 남의 얘기에 귀 기울일 여유도 의지도 사라진다. 모두가 함께 한다는 의식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런 단절 속에서 우리는 외로움과 소외감만을 느낄 뿐이다. 넷째, 군중 속의 고독이다. 대도시의 고층 빌딩과 인파 속을 헤매고, 운동 경기장의 수많은 관중들 속에서 우리는 마치 환청을 듣듯 시끄러운 소음만을 들을 뿐이다.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 같은 공허함, 그런 속에서 우리는 영혼의 방황을 느낄 뿐이다. 그러한 가운데 현대인들은 우울증과 정신적 불안의 그림자에 압도되고 만다. 불안과 두려움 속에 일상의 삶은 파괴되고 육체적으로도 쇠약해진다. 짧은 시간 안에 극심한 감정의 변화를 겪기도 하고 통제할 수 없는 분노와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스스로를 파괴한다. 그렇게 정신적 불안은 치료해야 할 질병이 되고 있다.


어찌할 것인가? 이러한 불안 속에서 평생을 살아야 하는가? 불안은 인간의 정신 안에 자리한 거대한 석상(石像)과도 같다. 결코 옮길 수도 부술 수도 없이 그 그림자 아래 배회할 뿐이다. 죽음과 운명에 대한 불안, 나 자신의 무수한 결함과 위선에 대한 불안, 삶 속에서 느껴지는 허무와 공허감... 그것들이 불안이라는 이름의 괴물로 우리 속에 있다. 그리하여 영국의 침례교 목사 스펄전(C.H. Spurgeon)의 말대로 “불안은 내일의 슬픔을 비워주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힘을 앗아갈 뿐인 것이다.” 미국의 여성 시인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은 두 줄짜리 시를 통해 이렇게 묻는다.


In this short Life that only lasts an hour

How much - how little - is within our power


한 시간밖에 지속되지 않는 이 짧은 인생에서

우리가 할 수 있은 얼마나 많을—혹은 적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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