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 차의 지시등 소리, 선풍기 바람 소리, 배달원이 누르는 벨소리가 뚜렷이 들리지 않는다. 이태 전 동생이 보청기를 사줘서 끼었는데 잘 들리기는 하지만 금속성의 소리가 간혹 거슬린다. 한쪽만 사용해서 그런지 보청기 착용 후 청력이 더 떨어진 것 같다. 원래 어려서 앓은 중이염 때문에 기능이 약해진 오른쪽 귀가 말썽이다. 그래도 두 사람 사이의 대화는 크게 지장을 받지 않는다. 하지만 무슨 회의나 여러 사람이 대화를 나눌 때에는 여간 집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그냥 듣다 마는 수도 많다. 이런! 젊어서 헤비메탈을 너무 들었나? TV 소리를 너무 크게 틀어서 그런가? 은행 창구에서, 병원의 수납창구에서 간혹 당황스러운 경우가 많다. 이거 원 너무 노인네 티를 내나? 아직은 몸도 마음도 그대로인 것 같은데 왜 소리가 잘 안 들리는 거지?
하긴 어디 부실한 데가 귀뿐이겠나? 걸음도 느려진 것 같고, 층계를 오르는 일도 예전 같지 않다. 하긴 세월이 많이 흘렀지. 예전 같으면 당연히 노인이었을 텐데. 요즘은 나이가 들어도 건강하고 활동적인 사람들이 참 많다. 건강관리도 잘하고 운동도 열심히 하고 여유롭고 즐겁게 사는 사람들이 많아진 모양이다. 난 지금까지 운동도 별로 안 하고 영양제는 거의 먹어본 적이 없는 데다가 아직도 담배를 피우고 있다. 물론 아파트에 살아서 연초는 못 태우고 전자담배를 피우기는 하지만 그건 뭐 몸에 좋겠나? 생각해 보면 참 나이 드는 것에 대해 별 준비가 없이 살아온 것 같다. 하지만 생각은 늘 긍정적이다.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있어도 한숨 자고 나면 잊어버린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오래 생각하지 않는 것은 젊어서부터의 습관이다. 그래서 주변에서는 칭찬인지, 빈정거림인지 참 속 편한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무엇일까? 몸보다는 머리를 더 많이 쓰는 것일까? 글쎄. 나이 들면 기억력이나 암기력도 약화되고 반응 속도도 느려진다는데... 그래서 자동차 면허증도 반납하라고 하지 않는가? 가끔 TV에 나와 ‘연세 드신 분들’ 어쩌고 하는 50대들의 모습을 보면 실소가 지어진다. 지나 봐라. 정말 잠깐이다. 조만간 너도 ‘연세’ 잡수신 분이 되고 말 테니까. 젊은 사람 부러워서 하는 얘기는 아니다. 부럽기는커녕 안쓰러울 때가 더 많다. 사는 게 참 힘들겠구나. 생각은 또 좀 많을까? 그래봐야 나중에는 기억도 못하는 전설이 될 얘기들을 뭐 저리 핏대를 올리며 아는 척을 해대는 것일까? 내가 너무 빈정대는 걸까? 냉소적인 건가? 하지만 세월이 흘러야 깨닫게 되는 것이 분명 있는 법이다. 몸은 예전 같지 않아도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담고 있는 것이 나이 드는 것의 증거일지 모른다.
비틀스의 멤버였던 존 레넌이 이런 말을 했다. “나이는 친구의 숫자로 세라. 또한 눈물 말고 미소의 숫자로 세어라.” 친구와 미소? 좋은 얘기다. 그런데 레넌은 마흔의 나이에 괴한의 흉탄에 맞아 사망했다. 가슴 아프게도 나이 들었다 하기에는 너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아마 미처 알지 못하고 갔을 것이다. 나이 들면 숫자를 셀만큼의 친구가 남지 않는다는 것을. 미소 짓는 것도 눈물을 흘리는 것도 그다지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을. 인생이 몇 해나 계속될까? 기껏해야 백 년? 그중에 맑은 정신으로 사는 것은 얼마나 되지? 길게 보면 오래 살아도 알게 되는 것이 별로 없을지 모른다. 시인은 이십 대에 이미 최고의 시를 남긴다. 화가나 음악가도 별반 다르지 않다. 나이 든 후에는 가슴을 움직이는 작품이 드문 이유이다. 그러니 그들에게 있어 나이, 수명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여전히 나이는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것들과 더불어 쌓여간다. 그러니 자신이 겪어보지 못한 것들을 머리로 계산해 지레짐작하지 말았으면 한다. 예술가도 아니면서... 곧 육십, 칠십, 팔십이 되면 그때 제대로 알게 될 테니 말이다.
나이가 드는 것은 변화하는 것이다. 몸도 생각도 삶의 방식도 변화한다. 아무리 젊어도 생물학적으로는 죽어가는 것이라 하지 않던가. 변화를 두려워하지는 말아야지. 하루도 아침과 밤이 있고 계절도 봄과 겨울이 있듯이 인생도 젊음과 늙음의 변화가 있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니까. 나이 드는 것은 그저 또 다른 삶을 사는 것이다. 이전에는 살아보지 못한 삶. 그것에서 기쁨과 행복을 느끼는 것은 가능할까?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라. 인생의 어떤 지점에서 당신은 행복했던가? 그런 지점이 있기는 했던가? 그 행복은 얼마나 계속되었던가? 변화하는 세상, 변화하는 인생 그저 놀다가 가면 그뿐인 것을 너무 많이 바라지 말자. 그저 물처럼 흐르는 시간 속에 몸을 맡기고 아직은 모르는 세상을 기다려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