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첫 월요일. 가을비같이 조용히 비가 내린다. 가을인가? 하다가 낮의 후텁지근함을 떠올리며 고개를 젓는다. 유독 가을을 기다리는 여름의 끝자락. 왜 나는 가을을 기다릴까? 무엇을 바라는 것일까? 가을이 되면 더 외로울 텐데. 더 그리울 텐데. 찢어진 나뭇잎들이 포도(鋪道) 위를 날면 바람처럼 허하게 사라질 상념만이 남을 텐데.
가을을 기다리는 마음은 눈 내리는 겨울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오늘의 더운 여름을 보내고 싶은 조바심이다. 삶도 그렇다. 무엇을 기다리며 그리워하는 것은 다가올 것에 대한 간절함이 아니다. 그저 지금의 허전함과 무료함과 아픔을 지워버리고 싶은 얕은 마음이다.
이 비는 무엇을 말하는 걸까? 이제 곧 선선한 바람이 불고 아침저녁으로 따뜻한 이불속을 찾게 되리라는 전조일까? 당신이 기다리는 것이 온다 해도 결코 생각만큼 아름답지는 않을 것이라 주장하는 것일까? 추적추적 내리는 이 비는 기죽은 여름의 비일까? 저만큼 다가온 가을의 비일까? 하지만 창밖으로 보이는 거리는 충분히 고적하다. 외롭고 쓸쓸하다. 아 가을인가?
‘기다림은 고통스럽다. 잊는 것도 고통스럽다. 하지만 둘 중 무엇을 택할 것인가를 모르는 것은 더 괴롭다.’ 파울로 코엘로의 말이다. 소리 없이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무언가를 기다렸지. 지금도 기다리고 있지. 못 견디게 힘들었다 말할 수는 없지만 그건 아직도 미련처럼 남아서 좀처럼 털어낼 수가 없다. 잊어버릴까? 그럴 수 있다면! 굳이 선택해야 한다면 아직도 기다림 쪽이겠지. ‘잊었다’고 말하는 건 거의 반어법일 테니까.
계획하고 바랐던 삶은 잊혀 질까? 그것은 기다리는 것과는 다른 것일까? 기다림은 나의 것이 아닐지도 몰라. 그저 무언가가 나를 기다릴 뿐일지도 몰라. 그렇다면 기다림은 무의미한 건가? 가을비 같은 비가 끝없이 나를 헛된 상념으로 이끈다. 오늘이 즐겁고 행복하다면 내일을 기다리지 않을까? 내일이 무엇을 준비해 나를 기다릴지 모르니. 그러니 오늘 저 비처럼 그냥 내려버리고 말자. 어떤 시인이 빗방울을 ‘하늘의 씨앗’이라고 했었지. 씨앗. 무언가를 피워내려나? 씁쓸한 미소가 입가에 떠오른다.
가을이 오면 꼭 공원엘 가야지. 벤치 위에서 떨어진 낙엽을 바라봐야지. 잠시 허전한 마음을 느낀 들 어때? 혹시 하늘에 구름이라도 떠가면 보고 싶고 가고 싶은 사람과 장소들 때문에 눈물 흘릴지 몰라. 여름의 그 초록 물결이 오히려 고마워질 거야. 오늘이 가고 내일이 오는 것처럼 계절은 무심히 변하지만 마음속 기다림은 변하지를 않으니.
세상에는 두 가지 시간만이 있다. 무언가가 일어나는 시간. 무언가를 기다리는 시간. 기다리는 것과 벌어질 일이 반드시 같을 수는 없겠지. 하지만 기다리는 동안 깨닫게 되기를. 기다리기 위해 지금의 것을 버릴 수는 없을 거라는 걸. 에밀리 디킨슨의 시 한 구절. “당신이 만일 가을에 온다면/ 난 여름을 쓸어내고 말 거야/ 반은 미소로 반은 비웃음으로/ 마치 파리를 잡듯이” 아주 냉소적이다. 까짓것, 오든지 말든지. 지금 나는 살아있고, 숨 쉬고, 느끼고 또 기다릴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진실일 뿐이지.
다시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본다. 내리는 빗방울을 가을이 지켜보고 있다. 상념의 끝은 언제나 격한 꿈에서 깬 듯 온 마음이 얼얼하다. 가을을 보기 위해 여름을 지울 수는 없다. 결코. 그 모두 나의 삶이니까. 추억 속에 다시 기다려야 할 것이니까.
“주여. 오늘 하루 고요히, 평안하게 살도록 도와주소서. 믿음으로 평온하게 당신의 큰 힘에 기대게 하소서. 평화롭고 즐겁게 다른 이들을 만나게 하시고, 자신감과 용기로 내일을 맞이하게 하소서.”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