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은 ‘말’보다 미화되기 쉽다. 말은 떠오르는 생각을 순간적으로 입 밖에 내는 것이어서 간혹 실언을 하거나 감추고 있던 속마음을 드러내기도 한다. 하지만 시간을 두고 쓴 글은 읽히기 전에 여러 번의 수정이나 가필을 걸쳐 미사여구로 장식되거나 교묘한 논리로 위장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글에 대해 비판적이거나 혹은 의혹의 눈길을 보내는 것이다.
‘그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아.’라고 말한다. 입으로는 타인에 대한 배려와 정의를 말하고 무소유의 미덕을 주장하면서도 실제로는 이기적이고 사악하며 탐욕에 사로잡힌 사람들에 대한 경멸의 표현이다. 이렇듯 위선적이며 이중적인 말을 일삼는 사람은 언젠가는 자신의 실체가 드러나기 마련이다. 진실을 영원히 숨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말보다 더 믿을 수 없는 것이 글이다. 전문적인 글도 그것이 저자 자신의 식견과 실증적이고 논리적인 추론에서 나온 것인지 남의 지식을 짜깁기해서 내놓은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또한 자신의 경험을 드러내는 글도 그것이 실제로 겪은 일인지 꾸며낸 얘기인지 알기 어렵다. 그저 글쓴이가 정직할 것이라 믿는 수밖에 없다. 하물며 자신의 느낌, 감상 따위는 더욱 장식적이거나 가식적일 위험성이 있는 것이다. 도대체 이 세상에 던져진 수많은 글들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 것인가?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아테네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인 것은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과연 그럴까? 그의 말을 글로 옮긴 플라톤은 정말 소크라테스의 말을 있는 그대로 전한 것인가?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설파한 모든 철학에 맞추어 살았던 사람인가? 소크라테스는 ‘좋은 글을 쓰려면 자신이 분명하게 아는 것을, 읽는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써야 한다’고 하였다. 글에 대한 그의 근본적인 믿음이다. 하지만 그는 단 한 편의 글도 쓰지 않았다. 좋은 글을 쓸 수 없어서였을까? 아니면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서였을까? 혹시 그가 글을 도무지 믿을 수 없어서였던 것은 아닐까?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당신이 해야 하는 것은 단지 진실한 문장을 쓰는 것이다. 당신이 알고 있는 가장 진실한 문장을 쓰라.”라고 말했다. 무슨 뜻인가? ‘진실한 문장’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소설은 허구인데 그 꾸며낸 글 속에서 진실한 문장을 찾으라는 것은 모순되는 것이 아닐까? 헤밍웨이는 술자리에 모인 친구들이 ‘몇 마디 말로 소설을 쓸 수 있는가’라고 질문하자 잠시 생각한 뒤 이렇게 썼다고 한다. ‘아기 신발 판매. 한 번도 신은 적 없음.‘ 아! 왜 아기 신발인가? 그것을 왜 팔려고 내놓은 것일까? 아기는 왜 한 번도 그 신발을 신지 못했던 것인가? 이러한 의문들을 머리에 떠올리며 신발을 내놓은 가난한 젊은 부부와 제대로 된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세상을 뜬 갓난쟁이를 상상하면 그 짧은 글은 그 어떤 비극 못지않게 가슴 저리다. 헤밍웨이는 과연 뛰어난 작가가 틀림없다. 하지만 그는 투우와 사냥을 즐기는 방탕한 호색가이었으며 예순의 나이에 엽총을 입에 물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었다. 그의 삶과 그 애달픈 아기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으며 무엇이 진실한 문장이었던가?
수많은 시인들이 아름다운 시들을 남겼다. 그것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우리를 사색하게 하며 때론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가난을 견뎌가며 삶에 대한, 세상에 대한 통찰을 몇 개의 문장 속에 응축한다. 그래서 그들은 위대하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허망하고 의미 없는 낱말들을 마치 암호처럼 늘어놓는 가짜들도 많다. 하긴 세상에 어디 진짜만 있는가. 중요한 것은 자신의 감정을 가장 순수하고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굳이 시인이 아니라도 좋다. 가식 없이 정직하게 마음에 떠오른 감정을 몇 줄로 적어낸 서툰 글도 얼마든지 감동적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진실한 문장’ 일지 모른다. 투박하지만 자신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 글 말이다.
하지만 글은 그저 글일 뿐이다. 서툴지만 정직한 글이나 분칠을 한 거짓된 글이나 모두 다 글이다. 그리고 글은 그것을 쓴 사람의 마음이다. 그 마음의 진위를 가리는 것은 읽는 사람의 몫이다. 누군가에게는 위선적이고 불편한 글이 또 다른 사람에게는 위안이 되고 영감이 되기도 한다. 그것이 글의 역설이다. 그러니 글을 쓰며 너무 망설일 필요는 없다. 위대한 글귀나 유치한 일상의 기록, 심지어 낙서마저도 쓴 사람의 생각보다는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른 느낌으로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내가 불안함 속에서도 못난 글을 쓰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