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끔 손주를 부를 때는 아들의 이름을 외치고 아들에게는 남동생의 이름을 부르곤 한다. 왜 이러지? 치매 초기인가? 그런데 사실 이러한 실수는 젊은 시절부터 있었으니 꼭 뇌의 노화라고만 할 수는 없지 않을까 한다. 그보다는 오히려 많이 불러 익숙해진 이름이 입 밖으로 먼저 튀어나오는 것은 아닐까? 하여튼 이 정도의 실수쯤은 어색한 웃음으로 마무리하면 된다. 듣는 사람도 크게 나무라지 않으니까.
가끔 궁금할 때가 있다. 사람들은 하루에 몇 개의 낱말을 사용할까? 성격에 따라, 하는 일에 따라 크게 다를 것이다. 나처럼 40년을 넘게 교단에 있었던 사람은 사무실에 앉아 컴퓨터로 작업하는 사람들 보다는 확실히 더 많은 말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퇴직 이후에는 강의가 없어 하루 종일 몇 마디 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일까? 요즘은 가끔 늘 사용하던 낱말이 금방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무언가 기억나지 않으면 애꿎은 나이 탓을 하게 되는 모양이다.
흔히 나 같은 사람을 가리켜 ‘입으로 먹고살던 사람’이라 한다. 그럼 입으로 먹지 무엇으로 먹나? 당연히 ‘말(言)로 먹고살았다’는 뜻이리라. 특별히 비하하는 말은 아닐지 몰라도 뭔가 열심히 움직여 사는 사람에 비해서는 놀고먹거나 쉽게 살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도둑이 제 발 저린 것과 같은 것일까?
하지만 제 아무리 말을 많이 하더라도 국어사전에 수록된 50만 개의 어휘를 두루 사용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잘해야 1,000개 미만의 어휘가 고작 아닐까? 그것도 많은가? 100개면 충분하다고? 하긴. 그런데 쓰지도 않을 어휘를 왜 우린 머릿속에 다 담고 사는 것일까? 책을 읽기 위해서? 생각은 언어로 하는 것이니까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기 위해서? 그럴 수도 있지만 크게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세상의 모든 것에 모조리 이름을 붙이다 보니 그렇게 됐을 뿐이겠지. 그것도 누군가에게는 ‘거시기’ 하나로 통한다니 완전한 설명은 못 될 것 같다. 솔직히 말해 오늘 내가 입 밖에 낸 단어는 오십 개도 채 안 되는 것 같다. 하지만 머리로 생각한 단어는 제법 많다. 지금 쓰고 있는 이 짧은 글에서만도 수백 개 이상의 낱말이 사용되고 있으니까.
말은 길게 할수록 진정성이 떨어진다. 서로 모순되는 수많은 생각들과 거의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논리적일 수가 없다. 길게 하는 말을 듣다 보면 중언부언하는 경우가 많고 심지어는 과장이나 삭제로 사실을 은폐하는 경우도 있다. 거짓말도 말이니까. 누군가 실험을 해봤더니 십 분에 한 번은 거짓을 말한다나! 물론 그 의도가 언제나 나쁜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서 말을 잘하는 사람은 조심해야 한다. 자신의 말에 취해 허튼소리가 나올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흔히 ‘설화(舌禍)’라고 하지 않는가. 혀를 잘 못 놀려 화를 입는 모습을 우리는 주변에서 많이 본다. 그래서 ‘침묵은 금’이라 했을까? 하지만 그런 위험 때문에 언제나 침묵을 지키는 것도 문제다. 속을 알 수 없는 사람, 소극적인 사람으로 몰리기 십상이니까.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기억할 필요가 없다.’ 당연하다. 반대로 거짓말쟁이는 자기가 한 거짓이 들통나지 않으려면 무슨 말을 했는지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거짓말이 늘어나면 날수록 기억 회로는 늘 번잡하다. 거짓말하는 사람의 눈동자가 자주 흔들리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 일거다. 그래서 말보다는 몸짓으로 말하는 사람도 많다. 그냥 ‘네’ 하면 될 것을 고개를 까딱한다. 잘 모르겠는 경우에는 서양 사람처럼 양손을 들어 올리거나 어깨를 으쓱한다. 개성이긴 한데 나 같은 사람은 그 진심이 무엇인지 잘 파악이 안 된다. 다시 묻기도 민망하다. 대화 중 실제 말이 사용되는 것은 7% 밖에 안 된다고 한다. 표정이나 몸짓, 목소리가 훨씬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하니 눈치 없는 사람은 늘 오해의 수렁에 빠지기 쉽다. 그냥 말로 분명히 하는 것이 그렇게 매력 없고 어려운 일일까?
난 아름다운 말이 좋다. 격려의 말이 넘어진 사람을 일으키고 칭찬 한 마디가 기적을 만든다. 고맙다는 감사의 말이 위로와 감동을 주고 사랑한다는 말이 세상을 바꾼다. ‘말을 아끼라’는 표현은 말을 적게 하라는 뜻만은 아닌 것 같다. 소중히 하고 아름답게 가꾸라는 뜻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