굶주린 킬리만자로의 표범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 1899-1961)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 모두에 참가하였다. 1차 대전 중에는 구급차 운전병이었고, 2차 대전 중에는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파리 해방 전투에 참여하였다. 그는 거칠고 강인한 남자였다. 그리고 쉽게 사랑에 빠지는 격정적인 남자였다. 그의 전쟁 경험은 소설 ‘무기여 잘 있거라’의 토대를 이루었다. 그는 평생 네 번 결혼했다. 그리고 짧은 각각의 결혼생활은 열정적이었다. 특히 셋째 부인인 마서 겔혼은 최초의 종군 여기자로 두 사람의 사랑과 결혼 이야기는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헤밍웨이는 1953년 ‘노인과 바다’를 출간해 퓰리처상을 받았으며 이듬해에는 노벨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두 차례의 비행기 사고를 당해 건강을 크게 해치게 되었고, 작가로서의 활동도 쇠퇴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62세였던 1961년 여름 그는 엽총으로 자살한다.
권투와 사냥을 좋아했고, 샴페인을 사랑했던 작가, 거친 열정과 활력의 사나이, 그는 왜 엽총을 입에 물고 방아쇠를 당겼을까? 그가 유명한 노벨상 수상 작가이고 게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니 그의 행동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이 제기되었다. 흔히 이야기되듯이 그의 죽음은 우울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비행기 사고로 인한 육체적 고통과 작가로서의 한계에 도달했다는 자괴감이 겹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헤밍웨이에게서 연상하는 ‘터프 가이’의 이미지를 버리지 못한다. 전쟁, 낚시, 사냥, 투우, 권투 그리고 술과 여자, 거기에 유명 작가로서 얻어진 엄청난 부와 명예. 그는 거칠 것 없는 남성성의 상징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런 이미지에 겹쳐진 것은 그의 ‘하드보일드’(hard-boiled)' 문체였다. 간결하면서도 힘 있는 그의 글들은 오랜 기자 생활에서 얻어진 글쓰기의 방식이었지만 그의 거친 이미지와 오버랩되면서 헤밍웨이라는 인물에 대한 선입견을 형성해왔던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의 자살의 원인이 무언가 다른 것에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물론 가십 같은 이야기도 떠돈다. 네 명의 부인을 두었던 그에게서 강렬한 성적 욕망을 보는 사람들은 그의 자살이 성 불능에 있었다고 말한다. 우스개처럼 전해지지만 남성성의 또 다른 측면으로 여겨지는 성적 능력이 그에게는 대단히 중요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이야기였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의 작가 F. 스콧 피츠제럴드(F. Scott Fitzgerald)와의 일화가 있다. 두 사람은 매우 가까운 친구 사이였는데 어느 날 피츠제럴드가 헤밍웨이에게 자신의 성기 크기가 너무 작은 것이 아닌가 걱정했다. 그러자 헤밍웨이는 그를 화장실로 불러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자넨 완전히 정상이야. 자네는 문제없어. 잘못된 것은 하나도 없다고. 자기 것을
볼 때는 위에서 내려다보니까 작아 보이는 거야. 루브르에 가서 조각상을 보고,
집에 가서 거울에 옆모습을 비춰 봐.”
속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헤밍웨이가 파리에 살았던 1920년대의 이야기를 묶어 놓은 ‘파리는 날마다 축제’ (A Moveable Feast)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사실 어린 시절 남성들의 대화 속에 흔히 등장하는 주제가 아닌가. 남성성과 성적인 힘을 연결시키는 것은 인류의 오랜 전통이었으니까. 하지만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해 깊은 성찰의 작품들을 써낸 그의 죽음에 연결시킬 이야기는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의 보도에 따르면 헤밍웨이는 ‘아르고’라는 암호명을 가진, 옛 소련의 정보기관 KGB의 간첩이었다고 한다. 이는 예일대학 출판부에서 간행한 ‘간첩들: 미국 내 KGB의 흥망성쇠’ (Spies: The Rise and Fall of the KGB in America'라는 책의 내용을 보도한 것이었다. 이에 따르면 헤밍웨이가 KGB에 포섭된 것은 1941년이었지만 적극적으로 간첩행위를 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이것 때문인지 헤밍웨이는 FBI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는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헤밍웨이의 전기 작가였던 A. E. 호치너는 말년의 헤밍웨이가 엄청난 피해망상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전한다.
“최악의 지옥이다. 정말이지 빌어먹을 지옥이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도청했다...
내 차도 도청당했다. 모든 게 다 도청당했다. 전화도 쓸 수 없었다. 편지도
중간에 뜯어보았다.”
호치너는 헤밍웨이가 미쳐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FBI가 헤밍웨이에 대한 파일을 공개했을 때, 헤밍웨이에 대한 FBI의 사찰은 사실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왜 그랬을까? 헤밍웨이는 왜 소련의 스파이로 포섭된 것일까? 이 의문은 영원히 미스터리로 남게 될지 모른다. 하지만 헤밍웨이는 어린 시절 이태리 군에 입대하여 1차 대전에 참전하였고, 특파원으로서 스페인의 내전에 종군했고, 2차 대전 중에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여한 활동가였다. 그는 삶의 안정감보다는 격동을 즐기는 기질이었을지 모른다. 이데올로기나 정치적 신념 따위는 그의 영역이 아니었을 것이다. 영국의 모더니즘 소설을 선도했던 노벨상 수상자 제임스 조이스와 친분을 나누었던 그는 1950년대 중반, 주간지 타임의 기자에게 조이스와의 기억을 이렇게 술회한다.
“같이 술을 마시러 가곤 했죠. 조이스는 싸움에 말려들곤 했어요. 상대를 잘 보지
못할 정도로 취한 상태여서 이렇게 말했죠. ‘해치워, 헤밍웨이! 해치워!’”
헤밍웨이는 행동가였고 삶에 대한 태도에서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그리고 전쟁 속에서 본 인간의 삶과 죽음을 깊이 생각했던 작가였다. 그런 그가 어떤 정치적 주의나 신념에 함몰되어 스파이 노릇을 하려 했다는 것은 믿어지지 않는다. 그의 단편 ‘킬리만자로의 눈’에 나오는 첫 줄은 인상적이다: “이 표범이 무엇을 찾아 이 높은 곳까지 왔는지 아무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의 인생은 킬리만자로의 눈밭에 얼어 죽은 표범처럼 삶과 죽음 사이를 방황해 온 것은 아닐까? 그는 자신의 노년에 대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1950년 뉴요커지에 실린 글 중에서 나오는 얘기이다.
“나이가 들면 남을 따분하게 만들지 않는 현명한 노인이 되고 싶소... 친구들에게
편지를 많이 쓰고 답장을 받고 싶어요... 85세까지 사랑을 잘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가끔 비둘기에게 모이를 주러 공원에 갈 수는 있겠지만, 공원 벤치에
앉아있고 싶지는 않아요. 긴 수염을 기르지도 않을 겁니다... 나이아가라 폭포에
가본 적도 없소. 그나저나, 마차 경주는 해볼 생각이에요. 75세를 넘지 않으면
아주 나이 든 게 아니에요... 나중엔 프리티 보이 플로이드 이후 제일 예쁜 시체가
될 거요... 영혼을 구원하는 걸 걱정하는 건 멍청이들뿐이에요. 지적으로 영혼을
잃는 게 사람의 의무인데 누가 영혼을 구원할 걱정을 합니까... 더 걱정할 필요가
없죠... 죽으면서 이치에 맞게 행동하려면 꽤 훌륭한 사람이어야 해요.”
그랬을 것 같다. 헤밍웨이는 숨차게 달려온 인생의 끝자락에는 평범해지고 싶었는지 모른다. 친구와 사랑과 여유로움 그리고 사소한 것들에서 즐거움을 느끼고 싶었을 것이다. 영혼의 구원 같은 거창한 주제에서 벗어나 평화로워지고자 했을 것이다. 그의 대표적인 장편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For Whom The Bell Tolls)의 주인공 로버트 조던은 미국인으로서 스페인의 내전에 참여하여 반파시스트 전쟁에 참여한다. 그곳에서 아름다운 여인과 사랑에 빠지고, 그는 무의미하지만 자신의 마지막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다. 그리고 부상을 당해 움직이지 못하게 되자 사랑하는 여인 마리아와 그의 동료들을 떠나보내고 다가오는 적들을 향해 총을 겨눈다. 마리아의 울부짖음을 들으며 그는 최후를 맞는다.
헤밍웨이는 그런 인생을 살았고, 그런 죽음을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그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 속에 피폐해 갔고 결국 비참하게 삶을 마감한다. 그가 마지막으로 들었을 울부짖음은 무엇이었을까? 그가 마지막 들은 종소리는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그가 소설의 제목으로 삼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16세기 영국의 시인 존 던(John Donne)이 쓴 글의 일부였다.
사람은 누구도 섬이 아니다,
온전한 자체로서.
각각은 대륙의 한 조각이며,
대양의 한 부분.
만일 흙덩이가 바닷물에 씻겨 내려지면,
유럽은 그만큼 작아지리라.
만일 모래톱도 그리되면 마찬가지.
만일 그대의 땅이나
친구가 그리되어도 마찬가지 이리.
누군가의 죽음이 나를 작게 만든다.
왜냐하면 나는 인류에 속해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보내 알려고 하지 말라.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는지를,
종은 그대를 위해 울리는 것이니.
헤밍웨이는 그 격동의 삶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 위대한 작가였다. 그의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든 그는 자신이 살던 세계의 확실한 일부였다. 왜냐면 그의 죽음은 인류에게는 상실이었기 때문이었다. 헤밍웨이는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 (The Sun Also Rises, 1926)의 서문에서 미국의 여류작가 거트루드 스타인(Gertrude Stein)이 말한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라는 표현을 인용한다. "당신들은 모두 잃어버린 세대들입니다. “ 1차 대전 이후 환멸에 빠진 서구의 젊은 지성들을 가리킨 이 말이 왜 오늘에도 그대로 마음을 울리는 것일까? 헤밍웨이 역시 길을 잃고 헤매는 오늘의 우리와 다르지 않았다. 마치 킬리만자로의 눈 속을 헤매던 굶주린 표범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