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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의 물음

by 최용훈

아기 낙타가 엄마에게 물었다. “왜 우리 등에 혹이 달린 거죠?” “사막을 다니려면 물을 저장해 둘 필요가 있어서.” “긴 다리와 둥근 발은요?” “오래도록 사막을 걸어야 하니까.” “속눈썹이 너무 길어서 불편해요.” “그래야 바람이 불 때 사막의 모래로부터 네 눈을 보호할 수 있단다.” 아기 낙타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엄마를 쳐다보며 물었다. “우린 동물원 우리 안에 있는데 그것들이 왜 필요한 거죠?”


세상의 모든 것들은 존재이유가 있다. 아무 쓸모도, 이유도 없이 생겨난 것은 없다. 길가의 풀포기, 강가의 돌멩이, 하늘의 달과 별도 분명 있어야 할 필요가 있어 그곳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름다운 잔디가 깔린 정원에 솟아나는 잡초는, 바람 불어 깨끗이 청소한 창틀에 쌓이는 먼지는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곳에 존재하는 것일까. 옷장에 걸려있는 후줄근한 옷가지들을 바라보며 불현듯 미국의 흑인 여성시인 마야 안젤루의 시 한 구절을 떠올린다. “그대가 나를 흙 묻은 발로 짓밟아도/ 나는 여전히 일어선다, 먼지처럼.” 먼지조차 절망에 빠진 나를 일으키는데 무엇이 세상에 없어도 될 하찮은 것들인가!


사람도 제 각기 살고 있는 이유가 있다. 굳이 존재의 의미 같은 철학적 명제는 아니더라도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그곳에 있어야 할 이유가 있다. 누군가 나를 아프게 하거나,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순간들이 떠오른다 해도 그 모든 것들은 이미 존재한 것들이고, 그 흔적 또한 현실과 기억 속에 상처처럼 남는다. 존재하는 그 무언가를 어찌할 것인가. 그저 그것들이 여기에 머물, 혹은 머물렀던 이유가 있었을 뿐이다. 지금의 내 모습은 살아온 날들의 걸음이 멈춘 도착지이다. 외로운 사람, 슬픈 사람, 성공하거나 실패한 모든 사람들은 그 자리에 남겨진 이유가 있다. 그리고 그것이 그가 살아야 할 이유일지 모른다.


주변의 모든 것에 가치를 부여하면서 나 자신을 생각한다. 내가 걸어온 그 긴 여정 중에 이유 없이 방황한 적이 있었던가. 지금의 이 자리가 온전히 나의 선택이고, 나의 미숙함이고, 나의 자부심이 아니었던 적이 있었던가. 길은 여러 갈래였으나 지나온 길은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살아온 이유였다.


동물원 우리 속의 낙타는 혹이 필요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짧은 다리와 뭉툭한 발로도 능히 걸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속눈썹을 잘라내도 여전히 생존할 것이다. 하지만 있어야 할 곳에 있지 못한다 하더라도 나의 이 모습은, 낙타의 모습은 결코 변할 수 없다. 우리에 갇힌 것을 한탄할 필요는 없다. 그곳에서 나와 낙타는 여전히 존재의 이유를 찾고 있을 터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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