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현재시제’(Permanent Present Tense). 연극 과목을 가르치면서 인용했던 표현이다. 미국의 극작가 손턴 와일더(Thornton Wilder)가 ‘우리 마을’(Our Town)이라는 자신의 희곡에서 제시한 개념이었다. 삶 그리고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일들은 시간과 장소에 관계없이 서로 연결되고 계속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사실 무대 위의 모든 행위들은 관객들과 함께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는 일일 뿐이다. 세상이 무대이고 우리 모두가 배우라면 우리의 삶은 언제나 ‘영원한 현재시제’ 일지 모른다. 우리는 현재를 살아가는 존재들이니까.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이 소중한 것이니까. 지나간 것이 지금과 무관할 수 없으며 다가올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우리가 보고 듣고 실제로 체감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지금 현재일 뿐이다.
돌아보면 수십 년의 세월도 찰나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기억 속에 박힌 수많은 모래알들은 조금 떨어져서 보면 하얀 모래밭일뿐이다. 그렇게 지나간 일들은 한 장의 낡은 사진처럼 박제된 채 남겨지는 모양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퇴색한 사진 속에서 기쁨과 슬픔, 희망과 회한을 찾아내려 한다. 마치 그 속에 나의 현재가 존재하는 것처럼. 하지만 그것은 수천 년 전 양피지에 기록된 역사처럼 모호하고 공허하다. 다가올 날들 역시 그러하다. 우리가 맞이할 ‘내일’은 올 것인가? 단 하나도 확실치 않은 다가올 일, 벌어질 일들은 결코 그 어떤 예측도 기대도 무의미하게 만들 뿐이다. 실제로 만져지고 느껴지는 것은 내 앞에 던져진 나의 오늘이고 나의 현재일 테니까.
지금의 나를 생각한다.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가.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이 또 오늘 같을 나의 시간은 결국 어디에서 끝을 맺는가. ‘삶의 목적지는 죽음’이라는 새삼스러울 것 없는 명제로 또 끝을 맺을 것인가. 우리의 삶이 각자의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라면 내가 쓸 역사책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무엇이 쓰여 있을까. 얼마 전 TV에서 30대에 미국 프린스턴 대학 수학과의 종신교수로 임명되고 수학계의 노벨상이라는 필즈상을 수상한 허난이 교수의 인터뷰를 보았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의 천재적인 학술적 업적보다는 그가 모교였던 서울대학교 졸업식에서 한 축사의 내용이었다. 그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가 팔십 년을 건강하게 산다고 가정하면 약 삼만 일을 사는 셈인데, 우리 직관이 다루기엔 제법 큰 수입니다. 저는 대략 그 절반을 지나 보냈고, 여러분 대부분은 약 삼분의 일을 지나 보냈습니다. 혹시 그중 며칠을 기억하고 있는지 세어 본 적 있으신가요?” 그의 이 질문을 듣는 순간 나는 번뜩 나의 삶에서 지금 분명히 기억할 수 있는 날이 며칠이나 되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떠오르는 날이 얼마 되지 않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과거의 날들은, 그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든 벌써 망각의 영역으로 이전하고 있음을 분명히 느끼는 순간이었다. 물론 지금도 선명히 기억되는 시간들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과거의 기억은 현재에 떠올리는 순간 현재의 기억이 된다는 것이 뇌과학자들의 발견이다. 내가 기억하는 소수의 날들은 지금 현재로서 기억되는 것일 뿐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우리가 보내는 시간을 두 가지로 나눈다.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 잘 알려진 바대로 크로노스는 그저 흘러가는 양적인 시간이다. 우리 모두가 공통적으로 누리는 시간, 직선적인 순간들의 흐름이다. 반면 카이로스는 그 시간 속에서 의미를 지니는 특별한 순간을 말한다. 누군가 그 둘을 ‘시간’(時間)과 ‘때’로 번역한 것은 참 멋진 생각이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주어지지만 ‘때’는 기다리는 사람, 그것을 위해 준비하는 사람의 것이다. 인생이 얼마나 긴 것인가, 얼마나 짧은 것인가? 선으로 이어지는 그 무수한 순간들 가운데 우리가 기억할 순간은, 그 '때'는, 아주 소수이고 매우 애매할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현재 속에 발을 딛고 그 안에 살고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숙명적인 질문 앞에 망설이는 우리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는 전쟁을 끝내고 거친 바다를 건너 고향으로 돌아가는 오디세우스를 그리고 있다. 그것은 인생이라는 긴 항로를 헤치고 항구에 도착하는 우리의 모습을 상징한다. 그리고 운명처럼 맞닥뜨리는 그 무수한 고통과 시련, 그래서 호메로스는 ‘운명을 사랑하라’(Amor Fati)고 말했을 것이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고난의 시간들마저 끌어안고 사랑할 용기를 지녀야 한다. 신들이 사는 파르나소스 산 델피 신전의 입구에 새겨진 그 말, ‘너 자신을 알라’는 영원한 현재 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묻는다. ‘너는 자신의 현재를 사랑할 수 있는가?’ ‘너는 자신이라는 존재가 지녀야 할 삶의 목적을 깨닫고 있는가?’ 지금의 이 순간을 기억할 수 있고 의미 있는 카이로스의 ‘때’로 만들고 싶다면 고통의 운명을 붙들고 용기를 내야 한다. 자신의 ‘지금’과 ‘여기’를 깨닫고 다시금 긴 항로를 시작해야 한다.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불확실하다. 그러니 ‘영원한 현재시제’를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