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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 달걀, 커피콩

시련, 깨달음, 그리고 변화

by 최용훈

감자는 단단하지만 끓는 물속에 들어가면 부드러워져 부수기도 으깨기도 쉽게 된다. 달걀은 깨지기 쉽지만 끓는 물에 삶으면 속이 단단해진다. 어찌 보면 이 두 가지는 역경에 대처해 변화하는 우리의 모습 같다. 어려움을 맞이하면 우리는 변화한다. 때론 자신의 신념과 믿음과 용기를 버리고 상황에 맞추어 몸을 숙이고, 때로는 시련과 고통 속에서 나름대로 새로운 인식과 다짐으로 단련되기도 한다. 날이 더우면 옷이 얇아지고 비가 내리면 우산을 쓰듯이 우리는 날씨에 반응한다. 하물며 극심한 고통과 슬픔 속에 있다면 변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감자나 달걀과는 다른 하나가 있다. 커피콩을 갈아 끓는 물에 넣으면 자신의 변화와 함께 펄펄 끓는 물의 색을 바꾸고 향을 바꾸고 그 맛을 바꾼다. 역경 속에서 자신은 물론 주변을, 상황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역경은 자각의 계기가 된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리어왕’ 속의 리어는 자신의 왕권을 딸들에게 나누어준다. 절대 권력을 누리던 그가 노년이 되어 통치와 지배의 짐을 내려놓고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살고자 했던 것이다. 그는 세 딸을 불러 자신에 대한 그들의 사랑과 헌신의 정도를 묻는다. 첫째와 둘째 딸은 물려받을 땅에 대한 욕심으로 속마음과는 달리 입에 침이 마르도록 아버지를 찬양한다. 반면 셋째 딸은 리어의 반복되는 물음에 ‘아버지의 딸 된 도리로써 사랑할 뿐입니다.’라는 대답을 반복한다. 분노한 리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라고 소리치며 딸을 왕국에서 내쫓는다. 그의 치명적인 오류는 자신이 권력을 내려놓아도 계속해서 왕의 권한을 유지할 것이라 믿은 자만심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그의 몰락을 초래한다.


영토를 차지한 딸들은 아버지를 무시하고 홀대한다. 리어는 왕으로서 누리던 모든 특권을 박탈당한다. 극도의 분노와 절망감 속에서 성을 나온 그는 광야를 방황한다. “아비를 배신한 딸을 두는 것은 독사에 물리는 것보다 아프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몰락을 딸들의 배신으로 치부한다. 하지만 척박한 광야를 헤매는 가운데 그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 “내가 누구인지 말해줄 자 누구인가?” 리어는 고통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자각한다. 그리고 거대한 자연 속에서 인간이란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를 깨닫는다.


역경은 때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고통과 슬픔이 아니라 성공과 쾌락의 탈을 쓰기도 하는 것이다. 신의 축복으로 솔로몬 왕은 지상의 모든 힘과 부귀, 지혜를 누린다. 하지만 성공의 절정에서 그는 쾌락과 우상 숭배에 빠져 신을 배신한다. 그리고 몰락에 이르러 이렇게 탄식한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vanity of vanities, vanity of vanities; all is vanity.) 마침내 솔로몬은 자신의 어리석었던 삶을 되돌아보고 참회한다. 그에게 있어 역경은 배신과 왕국의 몰락이 아니라 그가 누렸던 영화와 쾌락이었던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또 다른 비극 ‘맥베스’에서는 반역을 통해 왕위를 찬탈한 맥베스가 최후의 순간 후회 가득한 독백을 읊조린다. “꺼져라, 꺼져라, 짧은 촛불이여./ 인생은 단지 걸어가는 그림자.../ 인생은 이야기, 바보들의 이야기/ 아우성과 분노로 가득하지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시련과 역경은 분명 깨달음을 얻게 한다. 하지만 깨달음은 변화를 수반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그래서 리어도, 솔로몬도 맥베스도 깨달음 속에서 종말을 맞이했지만 그들의 비극은 새로운 변화의 전조이어야 했던 것이다. 그렇듯 깨달음은 달라진 삶의 방식,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질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 것이다. 끓는 물속에서 감자는 부드러워져 식탁에 오른다. 달걀 역시 마찬가지이다. 시련을 통한 긍정적 변화이다. 하지만 진정한 변화는 커피콩처럼 자신뿐 아니라 타인을, 주변을 바꾸고 세상에 새로운 향기를 남기는 일일 것이다. 그것이 역경에 대처하는 가장 멋진 방법이다. 커피콩 같은 변화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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