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비아 플래스 : 아빠
실비아 플래스(Sylvia Plath, 1932~1963)는 미국에서 태어난 미국시인이지만 30년 남짓한 짧은 생애의 상당 부분을 영국에서 보냈다. 대학 졸업 후 그녀는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에 유학을 했다. 그리고 그때, 그곳에서 테드 휴즈(Ted Hughes)와 만나고 그와 결혼한다. 무명의 젊은 시인이었던 테드를 그녀는 미국의 문단에 데뷔시키고 물심양면으로 그를 돕는다. 그녀 역시 문학에 대한 정열을 지닌 작가였지만 남편의 성공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 두 아이를 낳고, 곤궁한 가계를 꾸려가기 위해 교사로 취업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인으로서의 경력을 쌓아가던 남편에게 애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 그녀의 삶은 극도로 피폐해 갔다.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뒤따랐고 그녀는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든 것을 바쳐 가정을 지켜왔던 그녀에게 남편의 배신은 극복할 수 없는 상처를 남겼던 것이다. 어느 추운 겨울날 그녀는 잠든 두 아이의 방 문틈을 테이프로 봉하고 부엌의 가스오븐을 틀어놓는다. 그녀는 그 오븐에 머리를 넣고 스스로 짧은 생애를 마감한다. 하지만 케임브리지에서의 만남, 영국에서 보낸 행복한 신혼생활, 남편과 함께 고민하고 미래를 꿈꿨던 그녀의 삶과 문학은 결코 영국이라는 물리적, 정신적 배경과 이후 영국의 계관시인이 된 남편 테드 휴즈와의 관계를 도외시하고는 생각할 수 없다. 이런 이유로 실비아 플래스와 그녀의 시를 20세기 영국 시인들 시리즈에 포함시키고자 한다.
실비아 플래스의 작품에는 강렬한 감정의 힘, 특히 정신병과 우울증, 개인적 정체성, 죽음에 대한 강박감이 드러난다. 그녀의 시는 고백적인 동시에 초현실적이었고 그녀만의 독특한 목소리를 지니고 있었다. 지극히 자전적인 그녀의 작품에는 자신이 겪었던 정신적 고통과 깨어진 테드 휴즈와의 결혼 생활, 권위주의적이었던 아버지와의 갈등에 대한 그녀의 감상이 묘사되기도 한다. 그녀의 시가 자연을 그리든 사회적 제약의 문제를 다루든 실비아는 일체의 가식을 배제하고 원시적인 힘과 원초적인 불안감을 있는 그대로 표출한다. 그럼으로써 현실의 모순된 상황과 2차 대전 이후 유럽인들의 삶에 내재된 긴장감을 적나라하게 그려냈던 것이다. 그녀의 시 중 상당수가 죽기 몇 주 전에 쓰여진 것으로, 그 솔직하고 대담한 감정의 분출은 많은 독자들에게 충격과 함께 깊은 공감을 자아냈다.
실비아 플래스의 시는 고백문학(confessional literature)과 페미니즘 이론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개인의 고통을 정밀하고 강력하게 표현하는 그녀의 능력은 독자와 작가들 모두에게 강렬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다음에 그녀의 부친과 남편에 대한 자전적인 시 '아빠'를 소개한다.
* 실비아 플래스의 대표 시집 : 아리엘(Ariel, 1965), 콜로서스(Colossus, 1960), 벨 자(The Bell jar, 1963, 소설)
아빠
당신은 이제 만들지 못해요, 만들지 못해요
더 이상은, 그 검은 구두를.
난 그 안에 갇힌 발로 살았어요,
삼십 년이나, 가엾고 창백한 모습으로,
감히 숨도 못 쉬고, 기침도 못했지요.
아빠, 난 당신을 죽여야 했어요.
그러기 전에 당신은 죽었지만 -
대리석처럼 무겁고 신(神)으로 꽉 찬 자루,
소름 끼치는 조각상, 잿빛 발가락 하나가
샌프란시스코 물개만큼 크고,
머리는 변덕스러운 대서양에 담근 채
아름다운 나셋 해변 푸른 바다에
강낭콩 같은 초록빛을 쏟아내네요.
난 당신을 되찾으려 기도하곤 했어요.
아, 당신.
독일어로 말하고, 폴란드 마을에 살았지만,
전쟁, 전쟁, 전쟁이라는
압연(壓延)으로 눌러 납작해진
그 마을의 이름은 평범했지요.
내 폴란드 친구가
말하길 스무 개는 될 거라고 했어요.
그래서 난 당신이 어디에 발을 딛고
뿌리를 내렸는지 결코 알 수 없었고,
당신에게 말을 걸 수도 없었어요.
혀가 턱에 걸렸어요.
혀는 가시철조망의 덫에 걸렸어요.
나, 나, 나, 나,
난 거의 말할 수가 없었어요.
난 독일 사람은 모두 당신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 역겨운 언어
기차, 기차
날 유대인처럼 실어 날랐죠.
다하우, 아우슈비츠, 벨젠으로.
난 유대인처럼 말하기 시작했어요.
유대인이라 해도 무리는 아닐 거예요.
그다지 순수하지도 진짜도 아니에요.
내 집시 혈통과 기이한 운명
내 타로 점, 그 타로 점으로 보면
난 아마 조금은 유대인일지 몰라요.
난 당신이 늘 무서웠어요.
독일 공군 같고, 고압적인 말투.
잘 다듬은 콧수염
아리안 혈통의 밝고 푸른 눈.
기갑부대 병사, 기갑부대 병사, 아, 당신 -
신(神)때문이 아니라 나치 스와스티카의 십자 문장이
너무 검어 하늘을 볼 수 없었어요.
모든 여자들이 파시스트를 숭배하지요,
얼굴을 짓밟는 장화, 짐승,
당신 같은 짐승의 잔인한 심장을.
당신은 검은 칠판 앞에 서있어요, 아빠,
내가 가진 사진 속에서,
발이 아니라 턱이 갈라졌지만
악마와 다름없지요,
사악한 남자,
내 예쁜 붉은 심장을 물어 둘로 찢어 놓았어요.
내가 열 살 때 그들은 당신을 묻었어요.
스무 살 때 난 죽으려고 했죠.
당신에게 돌아가려고, 가려고, 가려고 했어요.
단지 뼈라도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들은 날 자루에서 끌어내,
접착제로 꼼짝할 수 없게 만들었어요.
그때 난 뭘 해야 할지 알았죠.
난 당신을 표본으로 삼았어요,
투쟁의 결의가 표정에 가득 찬, 검은 제복을 입고
고문을 위한 형틀을 사랑하는 남자.
난 그래야지, 그래야지라고 말했어요.
그러니 아빠, 난 마침내 끝나고 말았어요.
검은 전화기는 뿌리째 뽑혔고,
목소리는 벌레만큼도 기어 나오지 못해요.
만일 내가 한 남자를 죽였다면, 둘을 죽인 셈이에요 -
자기가 아빠라고 하며 내 피를
일 년 동안 빨아댄 흡혈귀,
아니 칠 년이에요, 아빠가 굳이 알고 싶다면.
아빠, 이제 다시 누워도 돼요.
당신의 살찐 검은 심장에 말뚝이 박혔어요.
마을 사람들은 당신을 좋아한 적이 없었죠.
그들은 춤추며 당신을 짓밟고 있어요.
그들은 줄곧 알고 있었어요, 당신이라는 사람을.
아빠, 아빠, 못된 당신, 난 이제 끝났어요.
보스턴대학의 교수이자 유명한 생물학자였던 실비아 플래스의 부친은 그녀가 여덟 살일 때, 당뇨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아버지의 죽음은 그녀의 삶에 깊은 트라우마를 남긴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가 죽은 다음 해, 아홉 살 아이가 지하실에서 자살을 시도한 것만 보아도 그녀의 내면이 얼마나 미묘하고 취약했는지를 보여준다. 아버지에 대한 그녀의 기억은 이중적이었다. 크고 거대한 존재의 상실, 그리고 그에 대체할 존재에 대한 갈망, 그것이 남자에 대한, 남성적 세상에 대한 실비아의 무의식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에 대한 그녀의 환상은 남편이라는 또 다른 남성에 대한 이미지로 이전한다. 스미스 칼리지를 졸업한 후 풀브라이트 장학금으로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수학하게 된 그녀는 그곳에서 시인이자 비평가인 테드 휴즈를 만난다. 그리고 만난 지 몇 달 만에 두 사람은 결혼한다. 1956년의 일이었다. 그리고 7년 후 그녀는 절망 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녀의 종말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삶도 문학도 모두 그녀를 속이고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녀에게 아버지라는 이미지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보호와 관심을 원했던 어린 여자아이는 처음으로 찾은 사랑하는 남자에게 배신당하고 어린 시절 겪었던 그 상실의 절망감을 다시 느꼈는지 모른다. ‘자신을 아빠라 말하는’ 남자, 그에 대한 분노는 결국 스스로의 파괴로 끝나고 만다.
나중에 영국의 계관시인이 된 테드였지만 그 역시 죽은 아내의 그림자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했다. 페미니스트들은 그를 ‘살인자’라고 비난했다. 그리고 파경의 원인이 되었던 테드의 연인 아씨아 베빌 역시 자신의 네 살 된 딸을 수면제로 재우고 실비아와 같은 방법으로 세상을 뜬다. 그녀는 실비아의 죽음에 따른 세간의 비난을 감수하며 살아가는 너무도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고, 실비아의 환영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테드가 또 다른 여자를 찾아가자 결국 더 이상 살아갈 힘을 잃고만 것이었다. 두 여인의 죽음 이후 침묵을 지켜오던 테드 휴즈는 1998년 사망 직전에 실비아를 회상하며 쓴 88편의 시를 모아 ‘생일편지’라는 제목으로 출간한다. 아내를 사랑했던 이야기로 가득한 시집은 실비아에 대한 그의 연민과 참회의 기록일지 모른다. 그렇게 시인의 삶은 늘 현실과 환상 속에서 방황하는 모양이다.
* 시의 영문 원문은 길이 관계로 생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