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플랫폼 (13)

'초가을 서늘함 속에서'

by 최용훈

생전 처음 보는 육촌 누님이 나를 보러 오셨다. 팔순이 지난 누님은 아직도 혼자서 속초와 강릉을 오가실 정도로 정정하셨다. 날 보는 순간 누님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연세 든 분들은 왜 그리 눈물이 많은지. 그저 반가워서, 친정 동생이 기특해서일까? 그만은 아닐 것 같다. 그 눈물은 오랜 옛 기억을 떠올려서, 자신이 걸어왔던 수많은 순간들이 자신의 마음속에 새롭게 되살아나기 때문일 것이다. 큰 고모님도 날 보면 늘 눈물을 흘리신다. 먼저 간 동생이 생각나서, 이제 나이 들어 육신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가슴 아파서 그렇게 어른들은 눈물을 흘리신다.


그 눈물이 인생인 것 같다. 그리워서, 아련한 추억들이 가슴 저미도록 그리워서. 존재론적 고독감은 결국 우리가 혼자 남겨진다는 두려움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닐까. 가까웠던 누군가가, 명절날 그렇게 함께 웃고 떠들어대던 누군가가 어느 날 갑자기 차가운 철판 위에 벌거벗은 모습으로 누워있는 것을 볼 때, 우린 참으로 덧없는 인생을 본다. 그래서 더욱 소중한 것이 우리의 삶일지도 모른다.

여러 해 같이 일했던 동료들이 헤어짐을 아쉬워하며 내게 멋진 캘리그래피를 선물했다. 내 모습을 얼추 표현한 그림 옆에 ‘다시 한번 [무대]에서 내려오다...’라는 카피가 써져 있었다. ‘다시 한번 무대에서 내려오다.’ 좋은 표현이다. 인생은 언제든 내려와야 하는 무대이니까. 그렇게 내려왔다 다시 오르기를 반복해야 하니까. 내려올 땐 얼마나 서운한가. 그리고 다시 오르기를 얼마나 기대하는가. 하지만 다시 오르는 날 또다시 내려갈 일을 생각해야 하는 것이 우리네 삶 이건만...


오래된 책, 물건을 정리하면서 잠시 옛 추억에 잠긴다. 가슴속 깊이 무언가 아련한 기억이 떠오른다. 젊은 시절 이른 아침 명동 거리에서 들려오던 마이클 잭슨의 ‘벤,’ 그 음률의 기억이 또렷하다. 그토록 자주 친구들과 드나들던 낯익은 거리의 찻집... 그 정겨운 색채와 내음이 아직도 내 가슴에 새겨져 있다. 그래서 우린 눈물을 흘리나 보다. 보고 싶어서, 그리워서...


서늘한 가을바람에 목덜미보다 마음이 더 시리다. 거리에 뿌려진 낙엽들을 보면서 마치 꿈꾸듯, 그 해의 가을을 떠올린다. 종각 뒤 시몽 다방이었던가? 함께 어울려 그렇게 외로워하고 그렇게 암울했던 젊은 환희를. ‘가멸다’란 낱말을 어느 시집에서 찾아내곤 그 헌 책의 냄새와 함께 한껏 부유해진 마음을 기억한다.

이제 그 시인의 이름은 잊었지만 마로니에 길을 함께 걷던 벗들의 환한 웃음과 아름다운 시구를 기억한다. 덕수궁 돌담길에서 구워진 군밤 봉투를 손에 들고 말없이 함께 걷던 그 날의 그 따뜻했던 기억이 이젠 마음 한구석에서 아련함으로 전해온다. 외투 주머니에 함께 넣었던 두 손의 온기가 짜릿한 자극으로 남아있는 한, 젊음의 그 순간은 영원하겠지. 그렇게 나의 가을날은 깊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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