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용훈 Dec 13. 2020

시, 마음이 노래가 되는 것

우리 누나가 좋아하던 저 구름은 시어입니다.

시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마음이 느끼는 것, 마음이 겪어내는 것,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 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시인입니다. 오늘은 하루 종일 날이 흐렸습니다. 바다 빛은 아마 회색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바람은 시리게 숲 속의 나무들 사이로 불었을 겁니다. 분명 오늘의 시는 슬프고 우울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괜찮지요. 내일은 다시 찬란한 해가 뜨고 새가 지저귀고 꽃들이 피어날 테니까요. 그러면 기쁨의 시를 쓰게 될 겁니다.     


세상 모든 것이 시입니다. 길가의 돌멩이도, 콘크리트 사이로 피어난 장미도, 평생 아무 말도 안 하시던 우리 아버지도, 눈물짓던 어머니도, 어린 시절의 노랫말도 모두가 시입니다. “두둥실 흰 구름 멀리 떠가네. 우리 누나 좋아하던 저 구름~~”은 너무도 아련한 내 어린 시절의 시입니다. 그렇게 시처럼 우리네 인생은 수없이 많은 마음속 사연을 담고 흘러가는 것이죠.     


대학 시절 난 밥 딜런을 좋아했습니다. 그의 ‘바람 에 날려’(Blowing in the Wind)라는 노래를 특히 좋아했죠. 젊은 나는 그 곡의 가사가 마음에 와 닿았던 모양입니다. 밥 딜런은 결국 2016년 팝 가수로는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죠. 그의 노래는 시였으니까요.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야

사람은 사람다워 질까?

흰 비둘기는 얼마나 많은 바다를 항해해야

모래 속에서 편히 잠들게 될까?

포탄은 얼마나 많이 날아야

영원히 금지될까?

친구여, 대답은 바람 속에 날리고 있어

바람 속에 날리고 있어.      


산은 얼마나 많은 세월을 존재해야

씻겨 바다로 흘러갈까?

사람은 얼마나 살아야

자유로워질까?

사람은 얼마나 많이 고개를 돌려

그저 못 본체 해야 하나?

친구여 대답은 바람 속에 날리고 있어

바람 속에 날리고 있어.


1963년 나온 이 노래는 50년 대 이래 터져나온 미국의 불평등과 억압에 대한 약자들의 외침을 반영하고 있었습니다. 소수자였던 여성과 흑인들은 ‘자유와 평등’의 나라라고 불리던 자신들의 조국에 의해 버림받고 무시당했죠. 그들은 이 노래 속의 질문들을 수없이 되뇌었을 겁니다. 그리고 불어오는 바람에게 허망하게 외칠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인권운동과 함께 젊은 지식인들은 반전평화운동을 시작했지요. 인간성을 파괴하는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2차 세계대전을 겪고 난 후에도 여전히 국지적인 전쟁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세상에 대한 강한 저항의 외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저항은 폭력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외침은 은유와 풍자로 바뀌어 시와 노래로 표현되었던 것이죠. 거의 같은 시기에 나온 피트 시거(Pete Seeger)의 ‘꽃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 “ (Where have all the flowers gone?)는 간단한 표현의 반복으로 인생의 가장 단순한 진리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꽃들은, 그 꽃을 꺾은 소녀들은, 그들과 결혼한 남편들은, 병사가 되어 전사한 그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요? 꽃잎처럼 스러진 그 젊은 남편들은 무덤으로 갔지요. 그리고 마지막 연은 다시 묻습니다. 그 무덤은 어디로 갔느냐고요. 그리고 노래는 그 무덤이 꽃으로 태어남으로써 끝을 맺습니다. 그렇게 시는 인생의 이야기가 됩니다. 삶도 죽음도 시가 되고, 그 시는 다시 우리의 마음에 머물게 됩니다.     


20세기 한국은 슬픈 역사의 격랑에 휩쓸려 왔습니다. 주권의 상실, 해방과 분단, 동족 사이의 전쟁, 독재에 대한 피의 저항, 그리고 산업화와 민주화에 희생된 수많은 젊은 넋들. 그 외침의 세월 속에 20세기 초반 이국 땅 먼 곳에서 고국의 광복을 그리던 젊은 영혼들의 갈망, 그리고 1970년 대 억압의 굴레 속에서 자유를 향한 외침과 절절한 고백이 또한 아름다운 시와 노래가 되었습니다. 그 암흑의 시대에 스물다섯의 젊은 시인 윤동주는 이렇게 스스로를 참회합니다.     


懺悔錄(참회록)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시인은 구리거울에 비친 자신의 수치스러운 모습을 참회합니다. 무기력하게 흘려버린 세월을 안타까워하며 홀로 걸어가는 그 방랑과 수형의 길에서 우리는 또다시 시를 발견합니다. 참회하는 고백 또한 한 편의 시로 살아납니다. 그렇게 시는 역사 속에서 숨 쉬고 다시 깨어나게 됩니다. 1970년 대 근대화라는 미명 하에 총칼로 억압했던 그 참담한 우리의 역사 속에서 김민기라는 음유시인은 ‘아침이슬’을 노래합니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처럼

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

한낮의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 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아침이슬처럼 영롱한 슬픔, 잃어버린 젊음, 친구, 희망과 미래를 뒤로 하고 거 거친 광야로 떠나는 그들의 길은 나라마저 잃었던 선배들의 뒷모습과 어찌도 그리 닮았는지. 하지만 묘지 위로 떠오르는 태양의 시적 이미지는 시련 속에 피어나는 새로운 꿈의 표현이었습니다. 시는 그렇게 우리의 마음속에서 태어나 노래로, 외침으로 그리고 환희와 피맺힌 아픔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시의 두 가지 원리는 압축과 음률입니다. 수많은 마음속 감정이 몇 개의 단어로 표현되고, 언어가 주는 그 부드러운 울림이 영혼을 흔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시는 결코 거창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일상 속 작은 움직임, 모습, 느낌 모두가 영혼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아! 나의 시는 오늘도 내 속에서 흐르는 노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슬픔이 기쁨에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