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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훈 Sep 29. 2020

문학-우리들의 자화상 (1)

진실의 한 조각,  쓰지 않은 약

독일의 시성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는 문학을 삶에 대한 ‘고백의 단편’이라고 말했다. 인간이 언어를 발명하고 특히 운문(verse)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뒤 문학은 언제나 우리의 삶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문학은 괴테의 말처럼 인류의 고백이며 오랜 세월 동안 그려온 우리의 자화상이다. 문학은 인간과 인간의 삶에 대한 것이다. 그 삶 속에서 생겨나는 갈등의 기록이다. 인간과 신,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 그리고 나와 나 사이의 갈등, 그것의 기록이 문학인 것이다.     


진실의 한 조각    

  

인간을 알고 싶은가? 그렇다면 문학과 함께하라. 한 편의 문학작품은 삶의 한 조각을 그려낸다. 미국의 한 병원에서 샴쌍둥이 자매가 태어났다. 가슴 아픈 것은 두 아이의 몸이 서로 붙어있는 것이었다. 다리나 등이 붙어있으면 간단한 외과 수술로 분리할 수 있었으련만 이 두 아이는 가슴이 붙어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내장 기관---심장, 허파, 위, 간---모두가 하나뿐이었다. 스텔라와 안젤라. 그것이 그들의 이름이었다. 자매는 병원에서 자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몇 년을 보낸 후, 어느 날 아이들을 돌보던 의사가 두 아이의 부모에게 말한다. “이제 두 아이를 분리해야 합니다. 더 이상은 이렇게 살 수 없을 겁니다.” 그의 이 말은 커다란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법률가들이었다. 그들은 만일 의사가 분리를 위한 수술을 시도한다면 그를 즉시 살인 혐의로 고발하겠다고 말하였다. 이어서 종교계에서도 반대 의견을 발표했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인간의 의지로 결정할 수 없다는 얘기였다. 그렇다. 수술을 한다는 것은 한 아이를 살리는 것이지만 다른 아이를 죽여야 함을 의미했던 것이었다. 그렇게 논쟁은 시작되었다. 

  

순수문학의 원리 중 하나는 ‘있음 직함’(plausibility)이다.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소재가 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쌍둥이 자매의 이야기는 당연히 문학 작품의 소재가 될 만하다. 하지만 한 편의 작품이 두 아이가 처한 상황 전부를 그려낼 수는 없다. 그것은 누구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가에 따라 상황의 일부만이 알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쌍둥이의 어머니가 서술한다면? 수술을 해야 하는 의사의 시각에서는? 죽어야 하는 혹은 살아야 하는 아이의 입장에서 본다면? 여러 사람이 같은 나무를 보아도 그 보는 각도에 따라 나무의 모양이 달라지듯 두 아이의 이야기는 각기 다른 삶의 한 단면만을 보여줄 뿐이다. 그래서 문학은 ‘진실의 한 조각’(a slice of truth)만을 전달한다. 그러나 그것은 문학의 한계가 아니다. 우리의 삶이 결코 포괄적으로 인식될 수 없는 것임을 가르쳐주고 있을 뿐이다. 사람의 인생은 순간순간의 선택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선택에 따라 삶의 모습이 달라질 개연성은 크다. 그렇게 문학은 선택된 하나의 인생을 그려낸다.     


쓰지 않은 약      

  

앞으로 이 천 년 뒤의 문학은 어떤 모습일까? 그 형식은 변할지 몰라도 그 내용은 오늘날의 그것과 같으리라는 것을 확신한다. 그 이유는 이 천 년 전의 문학이 오늘날의 문학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문학 속 인물들의 삶의 방식은 달라져도 그들의 꿈, 그들의 고통 그리고 그들의 마음은 언제나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문학을 통해 인간을 배운다.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 그들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인생은 한 번 밖에 살아낼 수 없다. 문학작품은 한 번 밖에 살 수 없는 인생의 모습들을 파노라마처럼 펼쳐낸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인간의 무한한 잠재력을 선명하게 보여줌으로써 상상의 거리를 제공해주는 것이다. 

  

영국의 문학사가 윌리엄 J. 롱(Willaim J. Long)은 문학의 실용성에 대해 주장한다. 그는 고대 영시 '베오울프(Beowulf)'를 예로 들면서 주인공 베오울프와 괴물들의 싸움을 인간과 자연 사이의 갈등, 자연을 극복하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으로 묘사한다. 롱은 그러한 인간의 노력이야 말로 오늘날 과학정신의 원천이라고 말한다. 자연에 대한 극복의 의지가 없었더라면 현대의 과학기술문명은 존재할 수 없었으리라는 것이다. 문학은 뜬구름을 잡듯 사변적이고 모호한 것이 아니다. 구체적이며 실제적인 삶의 기록이다. 문학이 그려내는 삶의 궤적을 쫓아 우리는 미로와 같은 우리의 꿈, 우리의 미래를 더듬어 찾는다. 뭉뚱그려진 삶의 신화가 아니라 한 인간의 고뇌와 번민, 환희와 행복 그리고 손에 닿을 듯 구체적인 하나하나의 삶을 재창조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진실의 조각들을 맞춰 우리는 인간에 대한, 삶에 대한 통찰을 얻는다. 문학 속 인간의 모습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통해 얻어지는 깨달음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최고의 행위이다. 그래서 이 천 년을 지속한 서양의 기독교가 흔들리고 사람들이 정신적 혼돈 속을 헤매고 있었던 19세기에 영국의 비평가 매튜 아놀드(Mathew Arnold)는 문학을 통해 인간을 교화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즐거움을 통해 삶에 교훈을 줄 수 있으리라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문학을 ‘달콤함에 싸인 약’ (sugar-coated pill)이라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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