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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훈 Oct 03. 2020

탐욕, 영원한 아포리아

프로메테우스의 끊이지 않을 사슬

아포리아(aporia)는 ‘막다른 골목’을 의미하는 고대 그리스어이다. 그 어떠한 해결책도, 탈출구도 찾을 수 없는 상태, 그것이 아포리아이다. 삶 속에서 우리는 무수히 많은 아포리아를 발견한다. 삶 자체가 모순과 역설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그중 가장 본능적인 모순이 탐욕이다. 인간의 탐욕은 어떤 방법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영원한 아포리아이다. 탐욕의 결과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 탐욕의 덫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무언가를 탐하여 구하는 것이 인간의 속성일지도 모른다. 제우스의 불을 훔쳐 올림푸스 산에 쇠사슬로 묶인 프로메테우스는 독수리가 내장을 파먹는 고통을 당한다. 그럼에도 그는 죽지 않고 그의 내장은 끊임없이 자라난다. 우리는 사라지지 않는 탐욕을 품고 영원히 고통당하는 프로메테우스이다.     


돈, 탐욕의 뿌리    


기원전 150년 경 인도의 서북부를 지배한 그리스의 왕 메난드로스(Menandros)는 당시 불교의 고승인 나가세나(Nagasena)와 불교의 진리에 대해 토론한다. 그들의 이야기 속에 인간의 삶에 번뇌를 주는 세 가지 독(毒)이 등장하는데 그 첫째가 탐욕이다. 두 번째가 진에(瞋恚)인데 자신의 뜻에 맞지 않을 때 일어나는 증오심이나 분노가 그것이다. 세 번째 것은 우치(愚癡). 탐욕과 진에에 가려 사리분별에 어두운 것을 말한다. 결국 인간의 탐욕으로부터 진에와 우치가 나오는 것이니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가장 강력한 독은 탐욕이라 할 것이다. 가톨릭 교리에서 말하는 일곱 가지 죄에도 분노(wrath), 나태(sloth), 교만(pride), 음욕(lust), 시기(envy), 탐식(gluttony)과 더불어 탐욕(greed)이 포함된다. 탐욕이 죄가 되는 것은 그것이 언제나 과도하고, 원하는 것을 구하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탐하는 것 가운데 가장 비열한 것이 돈에 대한 탐욕이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인간의 품위도, 타인에 대한 사랑과 자비도, 여유도 모두 돈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가끔 돈에 대한 우리의 집착이 정당화되기도 한다. 1924년에 제작된 슈트로하임(Erich von Stroheim) 감독의 흑백 무성영화 ‘탐욕’(Greed)은 돈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 사랑과 그로 인해 왜곡된 행태를 보여준다. 프랭크 노리스(Frank Norris)의 소설 ‘맥티그’(McTeague)를 각색한 이 작품에서 우리는 돈에 의해 파괴되는 비극적 인간상을 보게 된다. 치과의사 맥티그는 트리나라는 아가씨와 사랑에 빠져 결혼한다. 그의 친구 마커스는 트리나를 사랑했지만 우정을 위해 그녀를 포기한다. 하지만 트리나가 복권에 당첨된 것을 알고는 딴마음을 품는다. 그는 지방정부와의 연줄을 이용해 친구인 맥티그의 병원을 망하게 한다. 빈털터리가 된 맥티그는 술로 세월을 보내며 심지어 그의 아내를 학대한다. 현대 사회에서 무수히 보게 되는 가정 비극의 전형이다. 이 작품의 역설은 그의 아내 트리나의 모습이다. 그녀는 가난 속에서도 복권 당첨으로 얻은 많은 돈을 감춰둔 채 남편과 함께 굶주리고 그의 학대를 감수한다. 수단으로써의 돈이 아니라 금전 자체를 사랑하는 병적인 심리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충격적인 장면은 그녀가 침대 위에서 마치 성행위를 하듯 돈을 쓰다듬고 애무하는 모습이다. 결국 그 사실을 알게 된 맥티그는 아내를 살해하고 그녀의 돈을 훔쳐 죽음의 계곡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까지 따라온 친구 마커스와 함께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다.  


돈에 대한 탐욕은 문학 작품 속에 가장 빈번히 등장하는 소재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돈이 인간에게 자유, 힘, 시간을 주는 것으로 정의한다. 평생 도박으로 인해 궁핍함을 겪었던 그에게 있어 돈은 인생의 중심일 수밖에 없었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비극은 아버지 표도르의 죽음을 둘러싼 추리극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결국 돈에 대한 탐욕에서 시작되고 심화된다. 그러나 물질에 대한 탐욕을 그리고 있는 문학작품의 결말은 언제나 비극이다. 스콧 피츠제럴드(F. Scott Fitzgerald)의 ‘위대한 개츠비’(Great Gatsby)는 가난 때문에 이루어질 수 없었던 사랑의 이야기이다. 개츠비가 사랑했던 여인 데이지는 사랑보다 안락한 삶을 택했고 그 수단은 결혼이었다. 개츠비는 온갖 부정하고 더러운 짓으로 거부가 되자 사랑하는 여인을 되찾기 위해 뉴욕의 그녀 집 부근에 대저택을 구입한다. 그리고 매일 밤 성대한 파티를 열고 데이지와의 만남을 계획한다. 마침내 그녀와 재회한 개츠비는 다시 데이지와의 사랑을 되살린다. 일상의 무료함에 빠져있던 데이지도 그와의 밀회를 계속하면서 새로운 사랑을 느낀다. 그녀의 온전한 사랑을 원했던 개츠비는 데이지에게 남편을 사랑하지 않았음을 고백하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그의 사랑에 대한 열망은 이미 물질이 주는 쾌락에 빠진 데이지를 변화시키지 못한다. 어떤 의미에서 ‘위대한 개츠비’는 탐욕의 비극이다. 돈에 대한, 사랑에 대한 탐욕, 그리고 그 탐욕으로 인해 파괴된 삶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권력, 그 허무함 


돈과 물질에 대한 욕심만큼 인간의 본성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것이 권력에 대한 탐욕이다. 아들러(A. Adler)에 의해 정립된 개념인 ‘권력의지’(Will to Power)는 열등감을 통해 인간의 행위 동기를 이해하려는 태도를 말한다. 즉 힘과 권력을 획득함으로써 자신의 열등감을 극복하려는 인간의 갈망이 권력의지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 경우 권력의지는 자아실현의 한 방편이 된다. 그러나 탐욕으로서의 권력의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드러난다.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의 ‘맥베스’(Macbeth)는 권력에 대한 허망한 탐욕을 그린다. 맥베스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개선하던 도중 마녀들을 만나 그들로부터 “왕이 되실 분”이라는 예언을 듣게 된다. 순간 맥베스의 마음속에 왕위에 대한, 권력에 대한 탐욕이 생겨난다. 결국 그는 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된다. 현실의 존재가 아닌 마녀의 한 마디에 불타올랐던 권력에의 탐욕, 그것은 인간이 권력을 얼마나 갈망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탐욕의 끝은 번민과 파멸뿐이었다. 맥베스는 가책에 못 이겨 죽음을 택한 아내의 소식을 전해 듣고 삶의 허무, 어리석은 탐욕의 종말을 허탈한 마음으로 고백한다. ‘꺼져라, 꺼져라 짧은 촛불이여/ 인생은 단지 걸어가는 그림자/ 가련한 배우,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 동안 무대 위에서 으스대고 안달하다가/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는./ 인생은 이야기, 바보들의 이야기/ 아우성과 함성으로 가득하지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생각하는 갈대     


프랑스의 작가 카뮈에 따르면 인간은 시간에 의한 파괴를 보며 부조리함을 느낀다고 한다. 시간의 흐름 속에 변질되고 파괴되지 않는 것은 없다. 그러나 그것은 삶의 무상함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에 내재된 무의미한 탐욕에 대한 조소이다. 시간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영겁의 시간 속에서 우리의 생은 그저 한 점에 불과하다. 부에 대한 갈망, 권력에 대한 왜곡된 의지, 쾌락에의 추구. 그것들은 찰나에 불과한 우리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파스칼(Blaise Pascal)의 얘기를 믿는다. 인간은 갈대처럼 나약하지만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 ‘한 방울의 독으로 우주는 인간을 죽일 수 있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우주보다 위대하다.’ 인간에게는 생각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우주가 자신보다 위대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탐욕에 물든 우리의 삶을, 아포리아에 갇힌 우리의 의식을 깊은 사색을 통해 바꿀 수 있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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