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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훈 Oct 04. 2020

자유를 위한 저항

무엇으로부터의 자유 : 무엇을 향한 자유

인간은 누구나 자유를 원한다. 자신을 속박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기를 갈망한다. 인류의 역사는 자유를 위한 투쟁의 역사이기도 하다. 1620년 103명의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종교의 자유를 탄압하는 영국을 벗어나 아메리카 대륙으로 향한다. 그들이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 불리는 ‘순례의 조상들’(Pilgrim Fathers)이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그렇게 종교적 박해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자유라는 이상 속에 탄생한다. 1789년 프랑스에서는 전제군주의 폭압에 항거하여 자유, 평등, 박애의 정신을 내세운 시민 혁명이 발생한다. 정치적 자유를 위한 시민들의 투쟁이었다. 그렇게 인류는 자유를 위한 투쟁을 계속해 왔다.     


갈매기의 꿈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 획득한 자유에 불안감을 느낀다. 어렵게 얻은 행복이 어느 순간 사라질까 두려워하는 나약한 존재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간혹 우리는 스스로의 자유를 포기한다. 독일의 정신분석학자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인간은 자유를 갈망하지만 막상 자유를 얻은 후에는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경향을 보인다고 말한다. 프랑스혁명은 군주제로부터 시민의 권리를 쟁취했지만 프랑스인들은 결국 더 강력한 권력 나폴레옹에게 굴복한다.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자유를 버리고 히틀러의 독재를 수용한다. 속박하는 무엇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자유라면, 자유로부터 벗어나려는 도피 역시 자유이겠지만, 그것은 완전한 형태의 자유일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단지 무엇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자유 이상의 것을 꿈꾼다.  

  

미국 소설가 리처드 바크(Richard Bach)의 소설 ‘갈매기의 꿈’은 자유를 위해 박해를 이겨내고 자아를 실현하는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의 이야기이다. 조나단은 단지 먹이를 얻기 위해 나는 다른 갈매기들과는 달리 완벽하고 멋진 비행을 꿈꾼다. 그리고 그 꿈을 위해 힘든 노력을 계속한다. 그는 동료 갈매들로부터 따돌림당하고 결국 무리로부터 추방당한다. 그러나 조나단은 결코 포기하지 않고 마침내 자유를 만끽하는 초현실적 공간까지 날아오른다. 더욱이 그는 다른 갈매기들까지 그 자유로운 비행으로 인도한다.                

  

‘갈매기의 꿈’은 우리가 추구하는 자유가 무엇인지를 암시한다. 그것은 단지 질병, 가난, 전쟁 등 우리를 속박하는 무엇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닌 무언가를 위한, 무언가를 향한 자유이다. “더 높이 나는 새가 더 멀리 볼 수 있다.”라는 작품 속의 표현처럼 조나단의 추구는 더 큰 깨달음을 위한 자유를 향한다. 그러나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다름’에 대한 박해에 저항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고통의 시간을 지나야 한다. 또한 자신만의 세계에 침잠하지 않고 주위의 다른 이들에게 그 자유로움을 전파할 수 있어야 한다. 조나단의 자유는 무언가로부터의 자유가 아니고 무언가를 위한, 무언가를 실현하기 위한 자유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꿈의 실현을 추구하는 자유이다.    


자유로운 영혼의 죽음     

  

진리를 추구하는 자유로움은 언제나 위험을 수반한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기독교의 독선에 맞서 진실을 추구했던 이태리의 과학자 갈릴레이(Galileo Galilei)는 화형의 위험에 처한다. 결국 그는 독선과 타협하지만 진실을 향했던 자신의 자유로운 의식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는 ‘아직도 지구는 돈다.’고 중얼거릴 수 있었던 것이다. 1572년 프랑스 소르본느 대학에서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라뮈(Pierre de la Ramee)라는 논리학 교수가 아리스토텔레스를 부정했다는 이유로 왕립협회로부터 강의를 몰수당하고 그가 쓴 책들은 불살라졌다. 신을 부정한 것도 아닌데 왜 그는 그토록 가혹한 형벌을 받아야 했던가? 16세기 후반은 르네상스가 꽃 피던 시절이었다. 신 중심의 중세를 지나 인간은 새로이 예술에 대한 본성을 회복했다. 그리고 신의 뜻에 따라 살던 삶을 자신의 의지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스스로를 이성적 존재로 인식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따라서 중세의 시각에서 르네상스는 신성모독에 다름 아니었다. 신에 대한 맹목적인 의존에서 탈피하여 인간의 독립을 내세웠기 때문이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사람들은 새로이 발견한 예술에의 열망을 표현하기 위해 그 기원을 찾아 헤맨다. 그리고 마침내 고대 그리스와 로마를 발견하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 르네상스는 그리스-로마의 복고일 뿐이었다. 그들의 철학적, 사상적 원천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이었고, 예술의 전범은 고대의 예술이었다. 중세의 성직자들이 교리를 내세워 신성모독을 처벌했듯이, 르네상스의 학자와 예술가들은 그리스-로마의 전범을 부정하는 라미 교수에게 똑같은 형벌을 내렸던 것이다. 

  

라뮈 교수는 가톨릭 암살단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종교개혁의 시대 가톨릭들은 그들의 권위를 부정하고 저항의 종교(Protestant)를 세우려는 개혁자들을 탄압했다. 과거의 확립된 체제에 대한 저항은 처단과 박해의 대상이었을 뿐이었다. 서양 사상사에 가장 자유롭고 혁신적인 국가였던 프랑스에게 라뮈 교수의 죽음은 수치였고, 자유로운 예술적 본성과 이성을 가진 자유로운 인간의 모습을 찬양했던 르네상스에게 있어서는 재앙이었다. 그리고 라미 교수는 자유로운 영혼의 대가를 치른 것이었다.     


사르트르의 자유    

  

자유를 위한 투쟁은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의식의 저항이다. 진실을 추구하고 자신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지키려는 것이 인간의 본능적인 속성이다. 현실의 삶이 고통스럽고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속박 속에 있더라도 마음은 자유로움을 추구한다. 그리고 그러한 자유에의 추구가 삶의 변화를 가능케 한다. 그러나 현대를 사는 우리는 자유라는 이상을 상실하였다. 그리고 사회 속의 보편적 관념과 삶의 행태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인다. 자유를 위한 의식의 저항은 더 이상 없다. 우리는 영혼의 자유로움을 포기하고, 자신의 마음을 따르는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체제와 규범의 틀 속에 안주하고 그것의 노예로 살아갈 뿐이다. 몽테뉴는 삶의 목적지는 죽음이라고 규정한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잃을 것이 너무 많다는 생각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사르트르(Jean Paul Sartre)는 “인간은 자유라는 형벌에 처해져 있다”라고 말한다. 인간은 의식의 작용에 있어 언제나 자유로운 상태이기 때문이다. 사르트르에게 있어 자유는 “자신이 바라는 것을 실제로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자유가 아니라, 행위의 목적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선택의 자유인 것이다.” 인간은 고통의 순간에도 자신의 의식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하지만 스스로 선택한 결과에 대해서는 자유로울 수 없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매 순간 자유로이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선택의 결과에 대한 책임은 언제나 우리 자신에게 있다. 그것은 사르트르가 얘기하듯 ‘형벌’ 일지도 모른다. 자유에 고뇌가 따르는 것은 그 때문이다. 자신의 마음을 따르는 것이 왜 그토록 어려운 일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다. 

  

제국주의 영국에 맞서 인도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간디(Mahatma Gandhi)는 비폭력 운동의 선구자이다. 그는 영국군의 무자비한 총칼 앞에서 외친다. “평화로 가는 길은 없다. 평화가 길이다.”(There is no path to peace. Peace is the path.) 마찬가지로 자유로 가는 길은 없다. 자유가 길이다. 간디의 비폭력주의에는 정신의 자유가 있다. 그는 그 자유를 통해 폭력의 고통을 참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내가 인정하는 유일한 독재자는 내 안의 작은 목소리”라고 말한다. 자유로운 영혼의 작은 목소리는 그 어떤 독재자의 무력 앞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이다.  

  

자유는 선택이다. 그리고 그 선택의 무게에 눌려 자유를 포기하기도 하지만, 우리는 또다시 새로운 선택의 자유를 얻는다. 그래서 인간은 영원히 자유로운 존재이다. 스스로의 마음을 따를 수 있기만 하다면 말이다. 자유를 얻기 위한 저항은 속박에 대한 것만은 아니다. 정신이 지니는 자유를 깨닫지 못하는 우리의 무지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다. 갈매기 리빙스턴처럼 무한히 비행하는 자유로운 영혼이 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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