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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훈 Oct 05. 2020

직선적 사고와 인과관계

‘post hoc, ergo, propter hoc'

서양 사람들의 사고는 직선적이다. 2,000여 년 이어진 기독교 정신의 결과이다. 성경의 이야기는 창세기에서 최후의 심판까지 직선적으로 이어진다. 시작이 있으니 끝도 있기 마련이다. 역사는 연대기적으로 기록되고 논리는 인과관계에 천착한다. 직선적인 선후의 관계 속에서 원인과 결과를 만들어 낸다. 반면에 동양의 사고는 원형적이다. 처음과 끝이 따로 있지 않고, 심지어 삶과 죽음이 다르지 않다. 불교의 윤회사상은 처음과 끝, 삶과 죽음이 영겁으로 이어짐을 나타낸다.     


직선적 인과관계    

  

직선적 사고는 직선적 인과관계로 발전한다. 하나의 사건이 다른 사건의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된다. 시작이 있으니 끝이 있고, 빛이 있으니 어둠이 있고, 선이 있으니 악이 있으며, 남자가 있으니 여자가 있다는 것이다. 이를 이항대립(binary opposition)이라 부른다. 현대 프랑스의 철학자 데리다(Jacque Derrida)의 ‘해체 철학’은 이러한 서양인들의 로고스에 대한 해체이다. 빛이 어둠보다 강하고, 선이 악보다 도덕적이라면 남성이 여성보다 더 우월한 것일까? 즉 이항대립에서의 가치판단에 대한 의심과 전도가 해체의 요체이다. 

  

직선적 인과관계는 흔히 논리의 오류를 수반한다. ‘post hoc, ergo, propter hoc'라는 말이 있다. 영어로 표현하면 ’after this, therefore, because of this'로 번역된다. 즉 어떤 사건이 우연히 다른 사건의 뒤에 올 때, 그것을 선후관계로 인식하지 않고 인과관계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의 오류는 우리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현상에 대한 오해로 이어진다.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1945년 7월, 미국, 영국, 중국, 소련의 수뇌들이 독일의 포츠담에서 만나 일본의 무조건적인 항복을 촉구하고 전후 일본의 처리 문제에 대해 공동선언을 발표한다. 이른바 포츠담 선언이다. 패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당시 일본의 칸타로 스즈키 총리가 기자회견을 연다. 그는 연합군에 항복을 하더라도 공식적인 발표 이전에 유리한 항복 조건을 협상하기 위한 시간을 벌고자 하였다. 그런데 그 회견에서 그는 대단히 애매한 용어로 일본의 진의를 왜곡한다. 모크사츠(もくさつ)라는 일본어는 ‘묵살하다’라는 뜻을 갖는다. 그러나 그 용어에는 ‘언급을 회피하다’라는 숨겨진 의미가 있다. 스즈키 총리는 ‘일본 내각이 포츠담 선언에 대해 언급을 회피한다’는 취지로 말하려 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언론은 그의 숨은 뜻과는 달리 ‘묵살하다’로 해석하여 보도하였다. 즉 ‘일본 정부가 포츠담 선언을 묵살하기로 하였다’로 전달하였던 것이다. 그의 언급이 보도된 사흘 후, 미국의 해리 투르만(Harry Truman) 대통령은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는 명령에 서명한다. 

  

스즈키 총리의 모호한 단어 사용이 인류사의 비극이라고 할 원자폭탄 투하로 이어진 것인가. 수 십만의 생명을 앗아간 역사의 대참사가 한 사람의 실언에서 비롯될 수 있을 것인가. 그의 언급이 없었더라면 원자폭탄의 사용은 없었을 것인가. 역사에 가정이 없다고 하지만, 만일 그러했다면 스즈키 총리의 실수는 일본과 일본인들에 대한 가공할 범죄로 인식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사건의 선후관계를 인과관계로 인식하는 논리의 오류일 가능성이 크다. 과연 연합군이 일본 총리의 그 한 마디로 원폭 투하를 결정할 수 있었을까. 그럴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하다. 그러한 결정은 전쟁의 흐름 속에서 다양한 이유에 의해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러한 논리적 오류는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들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언론에 보도된 바 있는 한 젊은 아빠의 잔인하고 패륜적인 행태가 한 예이다. 이 젊은이는 아내와 별거하는 동안 두 살배기 아들의 양육을 책임져야 했는데, PC방에서 온라인 게임에 빠져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않고 심지어 학대하기까지 했다. 더욱 끔찍한 것은 방치된 아이가 사망하자 아이의 사체를 쇼핑백에 담아 쓰레기처럼 내다 버렸다는 사실이다. 참으로 인간의 탈을 쓰고는 있을 수 없는 가공할 행위이다. 그가 사는 아파트 엘리베이터 CC TV에 찍힌 그의 태연한 모습은 분노를 넘어 공포의 느낌마저 주는 것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이 사건은 다른 많은 사건들에 가려 크게 언론의 관심을 끌지는 못했지만 언론보도의 핵심은 그가 게임중독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결국 그의 패륜행위는 온라인 게임의 폐해가 얼마나 끔찍할 수 있는 가에 초점이 맞춰졌다. 게임이 이 패륜 아빠의 잔혹한 행위의 원인 중 하나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를 괴물로 바꾸어 놓은 것, 아이의 죽음을 방치하고, 자식의 주검 앞에서 그렇듯 무정할 수 있었던 것을 단지 PC방을 가려는 그의 욕망에서만 비롯되었다고 인식하는 것은 그의 심성에 자리하고 있는 인간 생명에 대한 경시와 잔인성의 일부 밖에는 설명해주지 못한다. 그 보다는 그의 성장과정, 심리적 병리현상, 삶에 대한 극도의 무책임성이 비롯된 보다 근원적인 원인을 찾아보는 것이 바람직한 태도일 것이다. PC방 출입과 아이의 죽음을 직선적인 인과관계로 인식하고 그에 몰두하는 것은 어쩌면 표면만을 더듬어 상황의 실체에 대한 접근을 방해하는 논리의 오류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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