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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훈 Oct 19. 2020

여성성과 모성

남성이 만든 세계의 전복, 모성의 상실

선사시대는 모계사회로부터 시작된다. 채집의 시대에 남성은 수분을 위해 이 꽃 저 꽃으로 날아다니는 벌 나비와 같았다. 종족의 번식에만 기여할 뿐 그들은 자손의 양육에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았다. 그렇게 고대 인류의 집단은 모계를 중심으로 성립되었던 것이다. 부계사회로의 이전은 농경사회가 정착되어 남성들의 노동력이 필요해짐으로써 형성되기 시작한다. 경제활동의 주체가 남성이 되면서 부계 중심으로 집단이 형성되고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가 대두된다. 경제력만 뒷받침되면 일부다처가 정당화되었고, 윤리의식이 싹트면서 일부일처제가 자리 잡았던 시절에도 남성은 우월한 힘을 내세워 여성을 종족의 번식과 성적 쾌락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남성 중심의 세계는 시작되었다.   


남성이 만든 세계에서의 여성    

  

1920년 대 미국의 한 외딴 농가에서 그 집의 가장인 남편이 침대에서 목이 졸려 살해된다. 외부로부터의 침입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상태에서 유력한 용의자는 남편과 한 침대에서 잠을 잤던 부인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를 체포한 보안관과 검사는 살해의 증거를 찾아내지 못한다. 미국의 여류 극작가 수잔 글래스펠(Susan Glaspell)의 ‘사소한 것’(Trifles)이라는 희곡의 내용이다. 하지만 그들을 따라온 목격자의 부인과 보안관의 부인은 주인 없는 농가의 부엌에서 남자들은 발견하지 못한 살인의 동기를 찾아낸다. 아주 사소한 것들을 통해서 말이다. 더러워진 채 방치된 타월, 잘못된 바느질, 상자에서 빠져나와 있던 빵, 그 모든 것들이 두 여인의 눈에는 살인 혐의를 받고 있던 그 집 여주인의 비정상적인 심리상태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목이 비틀린 채 비단 조각에 싸여있던 작은 카나리아의 사체를 발견한 순간, 그녀들은 마침내 왜 부인이 남편을 살해했는지를 깨닫는다. 그것은 외로움 때문이었다. 농부인 남편은 아내의 외로움을 이해하지 못했다. 처녀시절 그렇게 명랑하고 아름다웠던 그녀가 남편의 무관심 속에서 얼마나 소외되고 절망했는지를 그녀들은 즉각적으로 알게 되었던 것이다. 자식 없는 그 삭막한 농가에서 노래하는 카나리아가 그녀의 유일한 벗이었음을. 결국 그녀들은 여성들만의 동료의식으로 그녀의 죄에 대해 함구한다. 남성 중심의 세계에서 버림받았던 여성의 모습, 그리고 그러한 여성들 사이의 불안한 유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수컷의 원형적 불안     

  

과거의 여성들은 노예나 다름이 없었다. 그들은 아이를 낳아 키우고, 집안일을 하고 심지어 농사일까지 도맡아 하였다. 그들에게는 현대의 여성들이 누리는 자유와 권리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열 달이나 자신의 자궁에 생명을 품고 자식에 대한 모정을 키웠던 여성들의 내적인 힘은 부계사회의 가부장적 권한을 넘어서는 강력한 것이었다. 그들은 새로운 생명의 창조자였기 때문이다.

  

19세기 스웨덴의 극작가 스트린드베리(August Strindberg)의 ‘아버지’라는 작품은 자식을 두고 벌이는 부부간의 치열한 전쟁을 묘사한다. 기병대장인 남편은 집안의 경제력을 움켜쥐고 아내와 자식에 대한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한다. 아내에게는 지나치게 인색하면서도 자신의 취미생활에는 관대하다. 마침내 늘 복종적이었던 아내가 남편에게 강력하게 반발하는 일이 발생한다. 딸의 진로에 대해 남편과 의견을 달리 한 것이다. 그녀는 딸을 화가로 키우고 싶었지만 남편은 교사를 시키겠다고 고집한다. 그리고 경제력을 지닌 자신이 딸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마침내 아내는 남편에게 선언하듯 말한다. “그 아이가 당신 딸이라고 어떻게 확신하죠?” 남편은 충격과 함께 깊은 의심에 빠진다. 모계사회에서 씨를 뿌리고는 버림받는 수컷의 원형적인 불안감에 사로잡힌다. 이후의 상황은 너무 연극적이다. 갈등에 사로잡힌 남자가 결국 정신병원으로 끌려가게 되니까...    


제2의 성과 메가트렌드     

  

프랑스의 철학자 사르트르와 평생 계약 결혼을 실천했던 여성학자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는 1949년 ‘제2의 성’(The Second Sex)을 출간한다.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라는 구절로 유명한 이 책은 교황청의 금서 목록에 포함될 만큼 당시의 규범과 풍토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파격적인 것이었다. 카뮈는 그녀의 책에 대해 “프랑스의 수컷을 조롱했다 “고 평하기도 하였다. ‘제2의 성’은 1950-60년대 페미니즘 운동의 선언문과도 같은 것이었다. 남성이 만들어내고 그들에 의해 지배되는 문화 속에서 수동적으로 만들어진 여성이라는 존재. 그 규정된 존재의 변화에 대한 갈망은 소수자로서의 여성에 대한 새로운 자각으로 이어졌다. 한 때 여성 해방운동(Women's Liberation)이라 불렸던 초기 페미니즘 운동은 지극히 정치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여성의 강인함을 이루는 모성성에 의해 통제되어 혁명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모성과 부성, 여성성과 남성성은 상호 극복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본질적으로 보완적이라는 인식의 결과였다. ‘여성스러움’ (feminine)의 강요에서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여성주의’ (feminist)로의 전환 그리고 마침내 여성이 자신의 생물학적인 성 (female)의 장점을 주장하면서도, 남성의 그것을 인정하는 화합으로의 진전, 그것이 페미니즘의 전개과정이었다.

  

메가트렌드라는 용어는 미국의 미래학자 나이스빗(John Naisbitt)의 저서 ‘메가트렌드’ (Megatrends)에서 유래한다. 현대 사회가 겪고 있는 거대한 시대적 조류를 뜻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21세기의 키워드로 감성, 상상과 함께 ‘여성성’을 강조한다. 미국의 미래예측 기관인 소셜 테크놀로지 연구소(Social Technologies)는 다가올 2020년의 메가트렌드를 열 가지로 정리하였는데 그중 ‘여성 주도권’ 시대를 언급하고 있다. 사실 현대사회에서 여성은 이미 소수자가 아니다. 물론 아직도 남성 중심의 세상이지만 최근 여성의 사회진출이나 지위의 향상을 보면 그 발전의 속도는 놀라울 지경이다. 수렵, 농경, 산업화의 시대에는 남성의 물리적 힘이 요구되었지만 오늘의 정보화 시대에서는 여성의 고유한 섬세함, 감수성, 부드러움 등이 더욱 강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사이버 세계에서 농경시대의 정착민은 퇴보를 상징한다. 유비쿼터스(Ubiquitous)! 사이버 세계의 인간은 어느 곳이든 자유롭게 이동한다. 이들은 한 곳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이버 유목민(cyber nomads)이다. 하지만 과거의 유목민과는 달리 그들은 타인들과 네트워크를 통해 끊임없이 교감한다. 사이버 유목민의 등장은 어떤 의미에서 원시시대로의 회귀이다. 그리고 그 유목의 시대에 우리는 새로운 모계사회를 경험한다. 여성의 경제력 향상은 그들을 더 이상 남성 중심적 세상에서 수동적, 종속적 존재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여성이 새로운 주도권을 갖고 사회발전을 선도한다. 그럴 날이 멀지 않았다. 그래서 여성성이 지니는 새로운 잠재력, 새로운 가능성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남성과의 화합을 넘어서 이제 오늘의 여성성은 독자적 창조성을 주장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모성의 상실    

승천하는 메데아

  

고대 그리스의 비극작가 에우리피데스(Euripides)는 좌절된 사랑에 대한 복수로 모성을 파괴한 여인 ‘메데아’(Medea)를 창조한다. 사랑하는 이아손을 위해 메데아는 아버지를 배신하고 친동생마저 죽인다. 그러나 그녀의 사랑은 절망으로 변한다. 그녀는 권력을 위해 자신을 버린 이아손에 대한 복수로 그와의 사이에서 낳은 두 아이를 죽여 남편에게 보낸다. 격정에 사로잡힌 모성의 몰락이다. 메데아의 이야기는 사이버 유목민의 시대에 전개되는 새로운 모계사회의 문제점을 드러낸다. 여성의 주도권은 남성 중심의 세상을 여성의 그것으로 바꾸어놓는 것 이외에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남성의 육체적 힘을 여성의 부드러움으로 대체하는 것 외에 무엇이 있는가? 고대 모계사회의 힘은 여성성이 아니라 모성(motherhood)이었다. 모성을 상실한 여성성이 만드는 세상은 과연 지금보다 행복할까? 현대적 메데아들의 등장이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라면, 또다시 양성 간의 아름다운 화합은 무산되고 단지 전도된 남녀의 역할만이 남게 될 것이 아닌가. 복수를 마친 메데아가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듯 현대의 메데아들은 무기력한 남성의 어깨를 밟고 승천할 것인가? 여성성의 존중은 시대의 흐름에 대한 존중이다. 그러나 모성을 잃은 여성성은 이제 곧 퇴화될 남성의 완력에 불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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