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생각의 밥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용훈 Oct 21. 2020

눈물, 그 페이소스

상실, 동정심, 감동과 경외심

상실과 동정심    

  

눈물은 슬픔의 외적 표현이다. 그리고 슬픔의 첫 번째 원인은 상실감이다. 사랑하는 사람, 소중한 물건, 누리던 행복. 우리는 무언가를 잃어버리면, 슬픔의 감정과 함께 눈물을 흘린다.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일본 작가의 작품에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소설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작품이다. 와타나베라는 한 젊은이의 회상으로 시작되는 이 작품은 성장의 과정 속에서 겪는 꿈과 사랑의 상실, 그리고 혼자 남겨진 것에 대한 짙은 고독감을 그려내고 있다. ‘노르웨이의 숲’(Norwegian Wood)은 비틀스의 노래 제목이다. 그 곡에 이런 노랫말 나온다. “아침에 홀로 깨어났을 때, 이 새는 날아가 버리고 말았어.”(When I awoke I was alone, this bird had flown.) 날아가 버린 새. 그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눈물. 그것이 상실의 대가이다.

  

하지만 상실은 슬픔을 넘어 소중함에 대한 각성으로 이어진다.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그 모든 것이 얼마나 귀하고 감사했던가에 대한 깨달음이다. 영국의 시인 셸리(Percy Bysshe Shelley)의 표현처럼 ‘꽃의 향기는 아름다운 바이올렛이 시들고 나서야 그 잔향이 우리의 감각 속에 되살아난다.’ 그리고 새롭게 채워질 것에 대한 기대에 부풀게 된다. 그래서 눈물은 상실의 슬픔만을 나타내지 않는다. 우리는 눈물을 통해 상실의 고통을 극복하고 새로운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겪는 고통과 슬픔의 감정을 함께 느낄 때에도 우리는 눈물을 흘린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Poetics)은 서양 예술론의 기원이다. 그는 비극의 효과에 대해 ‘연민(pity)과 공포(fear)의 감정을 통한 카타르시스(catharsis)’라고 표현한다. 다른 사람의 비극을 보면서 관객은 그의 아픔에 연민의 정을 느낀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삶에도 같은 고통이 따를 수 있음에 두려움을 느낀다. 무대 위 주인공들의 감정이 이입되는 것이다. 이렇게 생겨나는 연민과 두려움을 현실이 아닌 허구의 세계에서 겪으면서 우리는 마음이 정화되는 것을 느낀다. 카타르시스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 하나는 ‘배설’(purgation)이다. 감정의 이입을 통해 슬픔을 느끼고, 눈물을 흘림으로써 마음속에 남아있던 감정의 찌꺼기를 배출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정화’(purification). 배출을 통해 순화된 정서를 의미한다. 눈물은 어떤 의미에서 자기 연민 그리고 두려움의 배출을 통한 정화의 결과물인 것이다.     


감동과 경외심    

  

그러나 슬픔이 우리의 눈물을 모두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위대한 신의 섭리, 자연의 광휘, 그리고 한 인간의 위대함에 압도될 때, 우리는 경외감 속에서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작지만 가슴 저미는 모든 일상의 감동적 일들이 우리를 눈물짓게 한다.  

  

미숙아로 태어난 일란성쌍둥이 자매가 있었다. 두 아이는 각자 작은 인큐베이터 안에 들어갔다. 언니는 서서히 건강을 찾아가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동생의 상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어느 날 담당 간호사는 동생을 언니의 인큐베이터에 함께 두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언니가 동생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은 것이다. 그 후 동생의 건강은 놀랄 만큼 빠르게 회복되어갔다.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느낌, 누군가의 사랑과 관심을 받고 있다는 느낌. 그것이 우리를 얼마나 행복하게 하는가. 얼마나 마음을 평화롭게 하는가. 단지 손을 얹었을 뿐이었건만 동생은 언니의 체온을 느끼고 안정감을 느낀다. 영화 ‘컨빅션’(Conviction)은 무죄인 오빠의 살인죄를 변호하기 위해 두 아이를 둔 평범한 주부에서 스스로 변호사가 된 한 여인의 이야기이다. 편견과 완고한 법률의 벽에 부딪혀 수없이 고통을 겪으면서도 그녀는 조작된 수사와 거짓 증거들을 밝혀내고 오빠의 무죄를 입증한다. 20년 만에 풀려난 오빠와 그녀의 대화:

“한 이십 년쯤 더 갇혀 있어도 될 거 같아.”

“난 죽어도 더는 못해.”

“내 말은 네가 날 위해 밖에서 애쓰고... 날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감동적인 이야기들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가슴 뭉클한 감정의 동요를 느낀다. 그리고 눈물이 난다. 사람들 사이의 따뜻한 교감, 그리고 남을 위한 헌신과 희생, 그 가슴 저미는 사랑의 모습들을 보며 우리는 진한 감동의 눈물을 흘리게 된다.    

  

영국 시인 알프레드 테니슨(Alfred Tennyson)이 쓴 ‘눈물,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Tears, Idle Tears)이라는 시는 가슴 깊이 간직한 신과 자연에 대한 경외심 속에서 지나간 날의 자신을 반추하는 눈물을 묘사한다. “눈물,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 나는 그것의 의미를 알지 못하오./ 저 깊은 신성한 절망 속에서 눈물이/ 마음에 솟아올라 눈에 맺힌다./ 행복한 가을의 들녘을 바라보며, 가버린 날들을 생각하며.” 거대한 자연의 위용, 신이 만든 우주에 대한 경외심 그리고 인간의 위대한 희생에 흘리는 눈물은 우리의 마음속에 내재된 겸허함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억제된 눈물, 억제된 감성    

  

눈물은 감정의 작용이다. 상실감, 동정심, 감동과 경외심의 외적 표현이다. 이런 의미에서 눈물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마음의 흐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음 놓고 울지 못한다. 자신의 감정을 지나치게 드러내지 않도록 훈련받았기 때문이다. 태어난 지 일 년이 된 아이들은 한 달에 65회 운다고 한다. 아프거나 슬퍼서가 아니고 자신을 보아 달라는 본능적인 의사의 표현이다. 그래서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 울음의 횟수는 줄어든다. 네덜란드의 심리학자 베흐트(M. C, Becht)의 연구에 다르면 성인이 된 남자는 한 달 평균 1.0회를 울고 여자는 2.7회를 운다. 여성이 남성보다 더 많이 우는 이유는 그들이 남성보다 더 의존적이고 감성적이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러나 연구에 따르면 어린아이의 울음은 남녀 간에 회수의 차이가 없다. 오히려 인체의 구조 상 남자가 여자보다 더 눈물을 흘리게 되어있다고 한다. 눈물샘 꽈리가 더 크고, 남성 호르몬은 눈물의 분비를 늘리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자가 여자보다 적게 우는 것은 사회적 요구와 훈련의 결과일 뿐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남자의 미덕에는 자제(self-restraint)와 극기가 포함된다. 그래서 그들은 터져 나오는 눈물을 애써 참으려 한다. 남자의 눈물을 나약함의 표시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그릇된 억제이다. 우리는 어른이 되면서 본질적인 것을 놓치도록 훈련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생텍쥐페리(Antoine de Saint-Exupéry)의 ‘어린 왕자’에 나오는 비행사는 어린 시절 코끼리를 통째로 삼킨 보아 뱀의 그림을 어른들이 모자로 착각하는 것을 보고 실망한다. 사막에 불시착한 그는 다른 달에서 온 어린 왕자를 만난다. 그리고 그에게서 양을 그려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왕자가 자신의 그림에 만족하지 못하자 그는 상자를 그려준다. 왕자는 상자 그림을 보고 즐거워한다. 상자 안에 양이 들어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어른이 되면서 우리는 본질을 잊어버린다. 그렇게 배우고 익숙해지기 때문이다. 눈물을 참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망각이다. 상자 속에 양이 있다는 어린아이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눈물을 참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눈물의 효과     

  

눈물은 감정의 찌꺼기를 없애주어 분노, 좌절, 슬픔, 고독 등의 고통을 순화시킨다. 웃음치료보다 눈물 치료가 더욱 효과적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눈물은 스트레스를 일으키는 호르몬을 배출함으로써 신체를 방어하는 역할을 한다. 또한 눈물은 슬픔의 감정을 순화하기도 한다. 다이애나 황태자비가 사망하자 영국인들은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며 눈물을 흘렸다. 연구에 따르면 이 당시 영국에서 심리치료나 정신과 치료를 받은 사람들의 숫자가 평소의 절반으로 줄었다고 한다. ‘다이애나 효과’이다. 눈물은 스트레스 호르몬을 줄이고, 오히려 엔도르핀, 엔케팔린, 세로토닌과 같은 우리 몸에 유익한 호르몬을 생성한다. 본성에 따르는 것이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것에 대한 의학적 발견이다.                

  

서양인들은 술에 취하면 우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기독교의 원죄의식 때문이다. 죄의식, 후회, 과거에 대한 회한과 그리움. 그것은 서양인뿐 아니라 인간의 공통된 정서 일지 모른다. 뒤돌아보아 후회와 회한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불타는 소돔 성을 뒤돌아보아 소금기둥이 되었던 성경 속 ‘롯’의 아내,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여 저승에서 데려오려던 그리스 신화의 오르페우스도 약속을 어기고 뒤돌아보아 결국 아내를 잃고 만다. 그래서 뒤돌아보지 말고 멀리 앞을 내다보는 미래지향적 삶을 살라고 한다. 과거에 대한 집착은 현재와 미래를 위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가끔 후회와 회한에 빠져 슬프게 눈물 흘려라. 그렇게 과거를 아쉬워하여 눈물 흘리고, 새로운 힘을 얻을 수만 있다면 말이다. 참는 것만이 능사일 수 없으며 또 그럴 필요도 없다. 눈물짓는 것이 누구에게 피해를 준단 말인가. 가끔은 영국 극작가 존 오스본(John Osborne)의 희곡 제목처럼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Look back in Anger) 그리고 눈물을 흘려도 좋다.                             

매거진의 이전글 여성성과 모성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