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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훈 Oct 22. 2020

게으름의 미덕

거북이의 게으름 : 속도와 방향

게으름은 때로 자신에 대한 실망과 좌절을 초래한다. “왜 나는 이렇게 게으른가? 왜 나는 다른 사람처럼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을 실천하지 못하는가? 게으름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낭비하는 것임을 알면서도 말이다.” 이렇게 우리는 자신의 나태함에 대해 자책한다. 왜 우리는 게으름에 대해 죄의식을 갖는가? 게으름은 진정 죄인가? 개인적인 측면에서 게으름은 목적 없이 자신의 시간과 가능성을 소모시키는 어리석은 행위이다. 그러나 현대의 기계적인 반복과 필사적인 경쟁의 삶 속에서 게으름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필요악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게으를 수 있는 시간과 자유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근면 숭배     

  

사실 근면이라는 미덕은 지배계급의 피지배계급에 대한 계몽의 수단이었을지 모른다. 봉건주의 시대의 지주들에게 있어서 소작인들의 게으름은 생산성을 감소시키는 제일의 적이었을 것이다. 스티븐슨(George Stephenson)이 증기기관을 발명하고 산업혁명이 시작되기 전만 하여도 유럽에서는 아직 근면이 최고의 미덕은 아니었다. 그러나 대량생산이 가능해지고 도시에 세워지는 공장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자본가들을 위해 봉사하게 되면서 근면은 또 다시 노동자들이 지켜야 할 덕목이 되었고, 산업화 시대에 게으름은 죄악이 되었다. 기계가 인간의 삶을 보다 여유롭게 하리라는 기대는 근면에 대한 숭배로 대체되었다.  

  

16세기 네덜란드의 화가 브뢰헬(Pieter Brueghel)의 작품에 ‘게으름뱅이의 천국’이란 그림이 있다. 직업이 다른 세 남자(기사, 농부, 학자)가 포식한 후 각기 다른 자세로 나무 밑에 누워 잠들어 있다. 그림 뒤편으로 우유가 강물처럼 흐르고 소시지로 만든 울타리가 길게 둘러쳐 있다. 거위가 스스로 쟁반 위에 올라가 있고, 돼지가 허리에 나이프를 꽂은 채 걸어간다. 게으름과 풍요로움의 극치이다. 화가의 의도는 방탕함에 대한 경고였을지 모른다. 당시의 사회상에 대한 풍자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측면에서 풍요로운 이상향에 대한 그리움의 표현이기도 하다. 게으름을 위한 풍요로움은 인간의 영원한 바람이기 때문이다. 14세기부터 유럽을 휩쓴 흑사병(Black Death)은 유럽인구의 1/4에서 1/3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수 천 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천형(Nemesis)의 흑사병은 유럽의 봉건주의를 무너뜨렸다. 근면을 강요당하던 농부들이 곳곳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중세의 신분제도에 대한 전복을 꾀하였다. “아담이 밭을 갈고, 이브가 실을 잣던 때에 귀족이 따로 있었는가?”(When Adam delved and Even span, who was then gentlemen?)라는 구호와 함께 일어난 반란은 소작농의 노역으로 게으름을 즐겼던 지배계급에 대한 저항이었다.    

브뢰헬 : 게으름뱅이의 천국


자본주의에 대한 죄악    

  

영국의 철학자 러셀(Bertrand Russel)은 20세기 지식인 가운데 가장 왕성한 저술활동을 한 사람이다. 그는 논리학자이며, 수학자였고 사상가이기도 하였다. 놀라운 열정과 능력으로 그는 철학, 논리학, 사회학, 심리학, 철학 등 20세기 인문학 및 사회과학의 전 분야에 영향을 끼쳤고, 무려 40 여 편의 저술을 남겼다. 이렇듯 근면하고 열정적인 학자 러셀은 그의 삶과는 대조적으로 ‘게으름에 대한 예찬’(In Praise of Idleness)이라는 글을 남긴다. 러셀은 사람이 하루에 네 시간만 일하고 나머지 시간을 여가로 이용할 수 있다면, 사회의 여러 가지 병리적 문제들은 모두 해결될 수 있으리라고 말한다. 실업도, 과소비도 공급과잉도 없이 모두가 여유로운 삶을 살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그는 현대를 사는 우리들의 지나친 근면의 문제를 지적한다. 개인적, 사회적 욕망의 달성을 위해 지나치게 근면 지향적이 되어온 우리의 삶의 방식에 문제를 제기한다. 어떤 의미에서 근면은 자본주의의 우상이다. 자본주의의 기본 개념은 이윤의 추구와 자본의 지배이다. 모든 노력이 돈을 버는 목적에 봉사한다. 인간의 모든 행위가 돈과 관련되어 있다. 러셀의 주장은 자본주의가 추구하는 근면에 대한 비판이었고 지나친 탐욕에 대한 경고였다.     


느림과 게으름    

  

게으름은 느림과 동의어가 되었다. 신속한 일처리가 요구되는 현실에서 느림은 곧 게으름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일을 서두른다. 도로도 건물도 계획 보다 빨리 완성하는 것이 훌륭한 일이다. 예상보다 늦는 것에 대해 관용을 베풀지 않는다. 네팔의 테라이 평원에는 시속 12km로 가는 기차가 있다. 1분에 200m를 가는 것이니 조금 빠르게 걷는 것과 다름이 없다. 속도는 늦지만 방향은 가려고 하는 목적지와 일치한다.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현대의 유물이다. 체코 출신으로 공산화 이후 프랑스로 망명한 작가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는 그의 소설 ‘느림’(Lenteur)에서 “인간이 기계에 속도를 위임하고 나서 모든 것이 변했다.”고 말한다. 작품 속의 ‘나’는 이렇게 탄식한다. “어찌하여 느림의 즐거움은 사라져 버렸는가? 아, 어디에 있는가. 옛날의 그 한량들은, 민요들 속의 그 게으른 주인공들, 이 방앗간 저 방앗간을 어슬렁거리며 총총한 별 아래 잠자던 그 방랑객들은? 시골길, 초원, 숲속의 빈터, 자연과 더불어 사라져 버렸는가.” 산업화 이후 정보화의 세계에서는 더욱 속도가 강조된다. 이제 느리게 걷는 것은 게으름의 표시일 뿐이다.

  

하지만 느림은 무언가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무엇을 위해 시간을 남겨두는 것이다. 프랑스의 사회철학자 피에르 쌍소(Pierre Sansot)는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라는 책에서 파스칼의 말을 인용한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고요한 방에 앉아 휴식할 줄 모르는 데서 온다.” 모든 것이 생산과 자본에 맞추어 빠름에 빠져있는 세상에서 느림은 삶의 의미를 다른 곳에서 찾아보려는 노력이다. 영국의 시인 브라우닝(Robert Browning)은 자신의 시에서 이렇게 말한다. “읽는 시간을 따로 떼어 두어라/ 그것은 지혜의 샘이기 때문이다./ 웃는 시간을 따로 떼어 두어라/ 그것은 영혼의 음악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시간을 따로 떼어 두어라/ 그것은 인생이 너무 짧기 때문이다.” 삶의 가치를 새로이 인식하기 위해서는 한 걸음 늦출 필요가 있다. 인생은 한가지에만 몰두해 낭비하기에는 너무 짧은 것일지 모른다. 삶의 새로운 즐거움을 위해서라면 조금은 게을러도 좋을 것이다. 브라우닝의 또 다른 시에는 여유로운 삶의 모습이 이렇게 그려져 있다. “하늘에 종달새가 날고/ 달팽이가 가시나무 위를 기어가고/ 하늘에 하느님이 계시니/ 이 세상이 얼마나 좋은가.”     


잃어버린 시간의 가치    

  

프랑스의 소설가 마르셀 에메 (Marcel Ayme)의 단편 소설 ‘생존시간카드’ 속의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이 같은 시간을 배급 받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시간을 팔 수 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힘든 시간이 버겁다. 그래서 돈 많은 부자들에게 시간을 판다. 어떤 이의 5월은 34일에서 끝나고 다른 이의 5월은 25일에서 끝난다. 주어진 시간을 서로의 필요에 맞추어 사거나 파는 것이다. 이 특이한 소설은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한다. 한 시간의 값은 얼마일까? 자본주의 세상에서 시간의 값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변호사의 한 시간이 짐꾼의 한 시간과 값이 같을 수 없다. 하긴 에메의 소설처럼 시간을 팔 수 있는 사회에서 변호사가 자신의 시간을 팔 이유는 없겠지만 말이다. 시간은 돈이다. 그래서 게으름은 죄악이다. 아까운 돈을 버리는 것과 같으니까. 하지만 게으른 사람이라 하더라도 소설처럼 자신의 시간을 팔 사람이 있을까? 구걸하는 사람에게 동전 한 닢은 던지겠지만, 단 일 분이라도 자신의 시간을 적선할 사람이 있을까? 모두에게 소중한 시간이다. 그래서 현대의 우리는 재산을 소중히 하듯 시간을 소중히 한다.     

  

게으름은 무의미한 시간의 소모라고 비난 받는다. 그러나 이 속도의 시대에 우리는 잠시 멈춰 설 수 있어야 한다. 시간의 소중함을 느끼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이다. 모든 것이 앞으로 나아가는 세상에서 정지는 퇴보를 의미한다. 하지만 방향을 잃은 속도는 혼란에 다름 아니다. 조금 느리더라도 옳은 방향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가끔 게으를 필요가 있다. 거북이의 미덕은 느림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마지막 목적지를 향해 늦더라도 제 길을 가는 것이 거북이의 게으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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