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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훈 Oct 26. 2020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배신, 전도된 젠더, 정염에 빠진 영웅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는 1609년 무렵에 발표된 셰익스피어의 대표적인 후기 사극 중의 하나이다. 셰익스피어의 사극은 대부분 영국의 왕들에 관한 것이지만, 고대 로마의 장군 시저의 암살을 그린 ‘줄리어스 시저,’ 시저 사후 로마의 이야기를 다룬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그리고 고대 트로이 전쟁을 배경으로 사랑의 배신을 그린 ‘트로일러스와 크레시다’도 셰익스피어의 사극으로 분류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는 시저가 암살된 이후 그의 양자인 옥타비아누스, 안토니 그리고 레피두스 세 사람에 의한 삼두정치의 과정에서 발생한 권력 암투와 빗나간 사랑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당시 안토니는 지중해 동부 지역을 통치하고 있었으므로 이집트에 머물고 있었다. 그리고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와 사랑에 빠진다. 사실 그녀는 암살된 시저와의 사이에서 사생아를 낳은 여인이었다. 따라서 두 사람 사이의 관계는 로마 전체에 큰 스캔들이었고, 이는 시저의 양자였던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 사이에 분쟁의 원인이 되었다. 안토니의 행위는 저열하고 반 로마적인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한편 삼두정치에 반발해 원로원의 일원이었던 폼페이가 반란을 일으키고 로마에 남아있던 안토니의 부인 풀비아가 사망하자, 안토니는 마지못해 그의 친구인 에노바부스와 함께 로마로 돌아오게 된다. 귀국 이후 안토니는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정염에서 벗어나는 듯 보였다. 다시 삼두정치를 강화하고 옥타비아누스와의 동맹도 공고히 한다. 이를 위해 안토니는 옥타비아누스의 여동생 옥타비아와 정략적으로 결혼하게 된다.     


삼두정치에 반발한 폼페이의 반란군과 전투에 돌입하기 직전, 안토니와 옥타비아누스는 폼페이와 극적으로 평화협정을 이루어내고 레피두스와 함께 폼페이의 배에 올라 평화를 축하하는 연회를 벌인다. 이때 삼두 정치의 세 지배자를 암살할 기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폼페이는 부하들을 설득해 신의를 지킨다.       


이후 안토니는스키티안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아테네로 향한다. 그곳에 도착한 순간, 안토니는 옥타비아누스가 합의된 평화안을 무시하고 폼페이를 습격하고 심지어 음모를 꾸며 레피두스를 옥에 가둔 사실을 알게 된다. 또한 옥타비아누스가 자신에 대해서도 비판을 서슴지 않자 분노한 안토니는 아내인 옥타비아를 오빠에게 보내어 중재를 꾀하는 한편 그와의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이집트로 돌아간다.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가 옥타비아와 결혼을 한 사실을 알고 질투심과 분노에 사로잡히지만 안토니가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을 알고는 안도한다. 그리고 이집트로 돌아온 안토니와 함께 군대를 일으킨다. 한편 안토니가 자신의 여동생을 로마로 보내고 클레오파트라에게 돌아갔다는 소식을 들은 옥타비아누스는 격노한다. 게다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한 안토니가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스스로를 황제로 참칭하고 그 자식들마저 왕과 여왕의 지위를 부여하자 그들을 향해 전쟁을 선포한다. 안토니는 그의 친구이자 충신인 에노바부스가 바다에서의 싸움을 피해야 한다고 간절히 충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악티움에서 옥타비아누스의 해군과 일전을 벌인다.            


안토니의 지휘로 해전을 벌이던 이집트군은 패배한다. 안토니는 클레오파트라의 함대 뒤를 따라 도망한다. 수치와 절망 속에서 안토니는 이렇게 한탄한다. “오, 그대여. 당신은 나의 심장이 그대의 배에 묶여있는 것을 잘 알고 있잖소. 당신은 날 끌어오지요. 내 영혼은 온전히 당신의 통치 하에 있고, 난 그대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 신의 명령조차 거부할 것을 말이오.”(3막 11장) 사랑의 열정에 빠진 안토니는 그렇게 옥타비아누스와의 전쟁에서 영웅의 명예를 상실한다. 로마의 대장군으로서 시저를 암살한 브루터스를 죽음으로 내몰고 당당히 권력의 한 축을  차지한 안토니의 몰락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이후 안토니는 옥타비아누스가 은밀히 클레오파트라를 설득해 자신을 넘겨주는 대가로 이집트의 평화를 보장하는 계략을 꾸미고 있다는 얘기를 듣게 된다. 분개한 그는 옥타비아누스와의 두 번째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다. 하지만 전투가 계속되면서  안토니의 군대는 패배를 암시하는 여러 불길한 징조에 사기를 잃고 군막을 이탈한다. 심지어 그의 친구 에노바부스마저 안토니를 떠나 탈주하자 안토니는 절망한다. 하지만 그는 에노바부스가 두고 간 보석들을 그에게 보낸다. 수치심에 사로잡힌 에노바부스는 후회와 죄책감 속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안토니는 옥타비아누스와 마지막 해전(海戰)을 치른다. 그러나 이집트의 함대들이 다시 후퇴를 하자 안토니는 비로서 클레오파트라가 자신을 옥타비아누스에게 넘기려 한다는 사실을 믿게 된다. 한편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의 분노를 두려워한 나머지 사원으로 숨어들어 그에게 자신이 자살했다는 거짓 얘기를 전하게 한다. 사랑하는 여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에 안토니는 배신에 대한 분노보다 더 큰 절망을 느낀다. 그리고  시저를 죽였던 브루투스의 자살을 떠올린다. 하인 에로스에게 자신이 몸을 던져 죽을 수 있도록  칼을 들고 있으라고 명령한다. 하지만 주인의 죽음을 도울 수 없던 에로스는 그 칼로 자신의 목찌른다. 결국 안토니는 홀로 자살을 시도하여 치명적인 부상을 입는다. 그때 클레오파트라의 전령이 도착하고 그녀의 죽음이 거짓이었음을 알린다. 부하들에 의해 클레오파트라가 숨어있던 사원으로 옮겨진 안토니는 그녀의 품에 안겨 숨을 거둔다. 안토니의 주검을 안고 그녀는 이렇게 되뇐다. “특별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 왔다가 가는 달 아래 무슨 특별한 일이 있겠어.”(4막 15장)          


한편 옥타비아누스에게 항복을 맹세한 클레오파트라는 포로가 되어 로마의 군중들 앞에 끌려나가는 치욕을 견딜 수 없었다. 그녀는 여왕의 복장을 갖추고 시녀들에게 독사가 든 바구니를 가져오도록 명령한다. “내 의관을 가져오너라. 왕관도 써야지. 난 불멸이기를 바라. 이제 다시 이집트의 와인을 마시지는 못하겠지만.”(5막 2장) 그리고 가슴에 독사를 품어 목숨을 끊는다.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의 시신을 발견한 옥타비아누스는 두 사람을 함께 묻어주라고 명한다. 그렇게 이집트를 평정한 그는 로마로 돌아가 황제가 된다.     

The Death of Cleopatra, 1785    Photo: Fine Art Images/Heritage Images/Getty Images

이 극은 안토니가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한량없는 사랑을 토로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흥미로운 것은 그 짙은 사랑의 분위기 주변으로 온통 정치적 책략과 음모가 가득하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 극의 주된 관심은 여전히 사랑일 수밖에 없다. 로마의 공화정이 몰락하고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로마제국이 시작되지만 이 극의 제목이 ‘안토니와 옥타비아누스’가 아닌 것은 무정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비극으로 끝나는 두 사람의 사랑이 이 극의 중심 주제임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안토니는 클레오파트라와의 사랑에 빠져 자신의 책무를 소홀히 한다. 그렇게 그는 ‘사랑과 의무’라는 전통적인 테마의 일부가 된다. 안토니는 클레오파트라에게 때로는 과도해 보이는 자신의 무한한 사랑을 표현한다. 그 사랑으로 판단이 흐려지고 마침내는 종말을 맞이하지만 한 남자의 여인에 대한 사랑은 그렇게 무모함으로 표현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 사랑의 탐욕과 과도한 열정이었다.    

“로마 따위는 티베르 강에 떠내려 가라고 해.

위대한 제국도 무너져 버리고.

내가 있을 곳은 여기뿐이니까. “  (1막 1장)      


안토니의 친구 에노바부스는 클레오파트라가 안토니의 사랑에 대한 식욕을 채워주지 못한다고 비난한다. “다른 여인들은 볼수록 식욕을 잃게 하지만, 그녀는 볼수록 더욱 굶주리게 한단 말이요.”(2막 2장)  사랑을 식욕에 비유하는 그의 말은 안토니의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순수한 사랑에 의심을 던진다.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는 늘 연회를 열어 흥청거린다. 클레오파트라 자신도 아름다움과 쾌락에 사로잡힌 듯 보인다. 극 속의 이집트는 퇴폐적이고 사치스러운 삶 속에 던져져 있다. “안토니는 주정뱅이로 그려질 거야. 나는 어떤 사내아이가 시끄러운 목소리로 클레오파트라를 창녀인 듯 연기하는 모습을 보게 되겠지.”(5막 2장) 그 모습은 서구의 문학과 예술이 그려내고 있는 퇴폐와 나태의 땅, 동양의 모습이기도 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안토니는 이집트의 동양적 방종을,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서양적 엄격함을 묘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로마인이었던 안토니가 이집트에서의 삶을 통해 쾌락을 추구하는 모습으로 변화되어 간다. 그리고 서양을 대표하는 옥타비아누스의 승리는 동양의 방종과 사치를 이긴 서양의 미덕을 찬양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셰익스피어는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의 몰락을 통해 동서양을 초월한 사랑의 비극성을 그려내고 있기도 하다.     


다른 한편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는 충성과 배신의 연극이라 할 수 있다. 작품 속의 지도자들은 추종자들의 충성에 의존한다. 안토니의 군대가 그를 버리고 떠날 때, 그의 패배는 너무도 자명했다. 지도자들이 추종자의 충성을 잃을 때, 사랑하는 이에 대한 믿음이 배신당할 때, 몰락은 필연이다. 안토니는 클레오파트라에 빠져 아내 풀비아를 버리고, 클레오파트라를 사랑하면서도 정치적 이해를 쫓아 옥타비아와 결혼한다. 그리고 결국 그녀를 버리고 이집트로 간다. 하지만 그 역시 클레오파트라에 의해 배신의 고통을 겪게 된다.            


충신이었던 에노바부스도 안토니에 대한 우정과 충성심을 버리고 그의 군막을 떠난다. 바보에게 충성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물론 안토니의 우정에 감격해 죄의식에 사로잡히고 결국 죽음에 이르지만 충성은 언제나 배신을 품고 있었다. 삼두정치에 항거했던 폼페이의 경우에도 세 권력자를 제거할 기회를 놓치자, 신하 메나스의 버림을 받는다. 하지만 폼페이 역시 자신의 어리석음을 후회한다. “오, 내게 말하지 말고 했어야지. 내가 그들을 해치는 것은 명예롭지 못한 것이지만 네가 그렇게 하는 것은 충성일 테니까. 이익이 명예보다 중요하지 않지만 그 반대도 역시 사실인 거야.”(2막 7장)     


안토니는 이집트를 위해 그의 조국 로마를 배반한다. 하지만 그는 악티움 해전에서 패해 달아남으로써 장군으로서의 명예를 잃어버린다. 옥타비아누스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협정을 깨고 폼페이를 공격하고, 레피두스를 투옥한다. 이집트를 지키기 위해 안토니를 배신한 클레오파트라에게 관용 대신 포로로서의 수치를 안겨주려 함으로써 그녀의 죽음을 초래한다. 그는 교활한 영웅이었다. 이렇듯 셰익스피어는 극을 통해 진정 명예를 지키고 정직하게 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묘사한다. 배신이라는 엄연한 현실 속에서 옥타비아누스는 명예롭고 충실한 인물이어서 승리를 거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수많은 배신과 거짓으로부터 살아남았을 뿐인 것이다.        

이 극은 다양한 메시지와 경고, 예언과 불길한 징조들로 가득 차있다. 이집트의 점쟁이들은 안토니의 운이 옥타비아누스를 이기지 못할 것이라 예언한다. 안토니의 병사들은 안토니의 수호신 헤라클레스가 그를 버렸다고 믿는다. 또한 강하고 거대한 안토니의 이미지를 보았던 클레오파트라의 꿈은 그저 꿈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난다. 이집트와 로마 모두에서 이러한 예언과 징조들은 중요하다. 또한 로마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미리 알고 있던 셰익스피어 시대의 관객들에게 그러한 기법은 극적 긴장감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     


반면 이 극의 중심인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의 관계는 전통적인 남녀 간의 역할을 전도한다. 클레오파트라는 강하고 계략에 능한 반면 안토니는 그녀의 지배 아래서 나약하고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인다. 술에 취한 채 여흥을 위해 서로의 옷을 바꿔 입는 모습은 전도된 남녀의 역할에 대한 상징이다. 악티움 해전에서 보였던 안토니의 비굴한 모습도 그것에 다름이 아니다. 결국 옥타비아누스의 승리는 이렇듯 뒤바뀐 전통적인 남녀의 관계를 정상화하는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클레오파트라의 죽음은 고귀해 보인다. 남자의 권위에 복속된 여성의 반란일 수도 있고, 그러한 남성성만큼 강한 여성성의 획득을 위한 치열한 투쟁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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