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생각의 밥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용훈 Oct 31. 2020

성(Sexuality), 유희하는 인간

쾌락 혹은 종족 번식

섹스는 영겁의 고독에서 터져 나온 생존의 본능이다. 그것은 쾌락이 아니었다. 종족보존을 위한 생명체의 치열한 투쟁이었다. 진화생물학자들은 지구 상의 생명체가 두 개의 성으로 분화되기 시작하면서 섹스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총, 균, 쇠’(Guns, Germs and Steel)의 저자인 미국의 인류문화학자 재러드 다이아몬드(Jared Mason Diamond)는 성의 기원을 11억 년 전으로 생각한다. 양성적 생명체에서 무성생식에 의해 이루어지던 종족번식이 급격한 환경 변화에 의해 유성생식으로 변화되고, 비로소 암수의 구분이 시작된다. 그렇게 종족의 번식을 위해 암수 간의 섹스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진화생물학적 관점에서 보면 생명체의 기원은 생명을 잉태하는 암컷이고 수컷은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암컷에서 분화된 것이다. 아담의 갈비뼈에서 이브가 나왔다는 창조론에 대한 과학의 도전이다. 그러나 종교적 도그마는 수많은 은유로 이루어져 있다. 암수가 결합된 원시의 생명체에서 성의 분화가 이루어졌다는 과학의 발견은 창조의 신비에 대한 반박이 아니고, 그것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다. 창조의 과정에서 어떤 성이 먼저 만들어졌는가가 아니고, 창조주의 양성 창조에 대한 과학의 확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쾌락의 탄생과 성 에너지    

  

이렇듯 성의 기원은 생물학적 종족번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인간은 이러한 생물학적 성에 쾌락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한다. 사실 인간은 쾌락을 위해 섹스를 즐기는 유일한 동물이다. 다른 동물들의 발정기는 인간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언제든 자신의 성적 욕구에 따라 성행위를 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은 성적 쾌락을 발견함으로써 다른 동물과 구분된다. 호모 루덴스(Homo Ludens) ‘유희하는 인간,’ 네덜란드의 문화사학자 하위징아(Johan Huizinga)의 표현이다. 넓은 의미에서 성은 인간이 만들어낸 유희의 하나이다. 하지만 철학적으로는 어떤 쾌락을 추구할 것인가에 대해 다양한 입장이 등장한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아리스티포스(Aristippos)는 쾌락을 인생의 목적으로 보았지만, 그가 얘기하는 쾌락은 육체적인 쾌락이 아니라 영혼에 의해 육체적 욕망을 통제함으로써 생겨나는 정신적 쾌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본능적 욕구 가운데 가장 강력한 것이 성욕일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 성 본능에 내재하는 에너지를 리비도(libido)라 불렀다. 인간은 이 성적 본능의 힘으로 스스로의 생명을 유지하고, 타인에 대한 사랑을 키워내며, 종족의 번성을 이루게 된다. 문명을 만든 인류의 원천 에너지는 성 에너지라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또한 무의식 속의 성적 충동이 인간 행동의 동기가 된다고 주장한다. 이성에 대한 접촉, 배설에 대한 욕구는 육체의 카타르시스를 의미한다. 성적 쾌락에 대한 욕구는 인간에게 내재한 가장 강한 힘의 원천 일지 모른다.      


편견과 죄의식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적 욕망과 성적 쾌락은 부정적 의미를 함축한다. 외설을 가리키는 영어 단어 ‘obscenity'는 라틴어 ’ob-caenum'에서 유래한다. ‘오물’이라는 뜻이다. 성적 욕구의 표현은 더러운 것, 피해야 할 것이라는 인식의 발로였을 것이다. 그것은 또한 ‘성’에 대한 인간의 죄의식을 반영하고 있기도 하다. 외설에 대한 법적 규제에 비판적이었던 버트런드 러셀은 외설을 “법정에서 판사를 충격에 빠뜨리는 것“일 뿐이라고 정의한다. 성의 표현을 법의 잣대로 판단하는 것에 대한 일종의 조롱이었다. 왜 성은 법과 도덕의 감시 대상이 된 것일까? 왜 성욕은 감춰야 할 동물적이고 저속한 본능으로 치부되고 만 것일까? 일차적인 이유는 종교에서 기인한다. 인간의 육체적 쾌락을 죄로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미국 작가 대럴 레이(Darrel Wayne Ray)는 ‘침대 위의 신’(Sex and God: How Religion Distorts Sexuality)에서 종교가 인간의 성적 본능을 억압해 왔음에 주목한다. 그는 "가서 신이 없는 섹스를 즐겨라!"라고 주장한다. 그렇게 인간의 성적 욕구를 수치심과 죄의식으로 억눌렀던 종교적 편견에 문제를 제기하고, 본능에 충실한 자연스러운 성행위를 강조한다.  

  

또 하나의 편견은 섹스가 단지 자손 번식을 위한 행위라는 인식이다. 이로써 쾌락을 위한 성적 행위는 죄악이 된다. 기독교에서는 부부간의 사랑과 일치, 자녀 출산을 목적으로만 성행위를 인정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인 우리의 몸을 거룩하고 정결하게 유지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는 혼전 성교ㆍ동성애ㆍ자위ㆍ혼외 성교ㆍ근친상간 등과 같은 성행위를 용인하지 않는다. 무분별한 성적 자유로움은 가족관계의 혼란을 통한 공동체의 파괴를 초래한다. ‘간음하지 말라’는 모세의 십계 중 하나는 육체의 쾌락을 탐하는 것이 죄임을 선언한다. 심지어는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행위조차도 쾌락에 대한 종교적, 도덕적 죄의식을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성에 관한 도덕과 윤리와 규범이 생기고 성 욕구의 충족이 제한을 받게 된 것이다.     


예술과 외설    

  

예술작품에서 성적 욕구의 왜곡, 타락, 좌절의 양상들이 묘사되는 것은 인간의 가장 본능적인 행태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된다. 피카소(Pablo Picasso)의 회화 속에 드러나는 에로티시즘은 종종 외설성 짙은 춘화에 가까워 충격을 준다. 피카소가 80대의 노인이었던 1960년대 후반 그는 르네상스 시대 거장들의 변태적인 성 욕구를 그림 속에 드러냈다. 미켈란젤로(Michelangelo)는 화가와 모델의 정사 장면을 훔쳐보는 관음증 환자로 그려져 있으며, 프랑스 후기 인상파 화가 드가(Edgar De Gas)는 늙어 성행위가 불가능했음에도 섹스에 대한 욕구에 사로잡혀 유곽을 배회하는 추하고 불쌍한 호색한으로 묘사된다. 피카소는 사라지지 않는 욕망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이가 들어 담배는 끊었지만 피고픈 마음은 여전히 남아있는 것처럼 욕망도 마찬가지다." 그 끈질긴 욕망이 예술로 표현될 때, 예술과 외설의 경계가 모호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피카소 : 화가와 모델의 정사를 훔쳐보는 미켈란젤로

  

성욕구나 성행위를 묘사한 예술작품에 대한 외설 논란은 시대가 변해도 끊이지 않고 있다. 러시아 출신 미국 작가 나보코프(Vladimir Nabokov)의 소설 ‘롤리타’(Lolita)는 파격적인 소아성애를 묘사하여 외설 시비를 야기했다. 37세의 문학 강사 험버트는 하숙집 여주인의 열두 살 난 딸 롤리타에게 강한 애정을 느낀다. 그녀의 곁에 있기 위해 그녀의 어머니 살로트와 결혼한다. 그러나 허버트와 딸의 관계를 알게 된 샬로트는 충격에 빠져 밖으로 달려 나가다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빗나간 애정의 비극은 모두의 죽음으로 막을 내린다. 이 소설은 1955년 프랑스 파리에서 출간되었으나 외설 시비 끝에 이듬해 판매가 금지되지만, 1958년 미국에서 다시 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된다. 시대와 장소에 따라 성에 대한 인식이 다를 수 있음을 보여준다.

  

19세기 프랑스 화가 쿠르베(Gustave Courbet)는 여성의 음부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그림으로 외설 논쟁에 빠진다. 천사를 그려달라는 요구에 “천사를 본 적이 없어서 그릴 수 없다.”라고 말할 정도로 사실적 묘사에 몰두했던 그는 기존 미술계의 금기를 깨고 파격적인 대상을 그려냈고 심지어 ‘세상의 기원’이라는 거창한 제목을 붙이기도 했다. 그는 금기 시 되어온 주제를 그려 외설이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예술작품의 외설 논쟁은 지극히 일시적이다. 영국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의 ‘율리시즈’(Ulysses)나 로렌스(D. H. Lawrence)의 ‘채털리 부인의 사랑’(Lady Chatterley's Lover)은 출간 당시 도덕적으로 지탄의 대상이 되고 법정의 시빗거리가 되었지만 오늘날 누구도 두 작품을 외설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는 외설의 기준이 한 세기도 지나지 않아 바뀔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2,000여 년 전 로마시대의 벽화에는 허벅지를 드러낸 반나체 여성들의 자유분방한 모습이 그려져 있지만,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에는 여성의 발목만 보여도 외설일 수 있었다. 로마의 성에 대한 기준이 19세기 영국보다 더 관대했던 것이다. 그것은 시대의 도덕관, 성에 대한 인식의 차이이다. 오늘날 우리는 성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가지고 있을까?  현대문학에서는 성애 묘사의 한계가 이미 사라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른 예술 장르에서도 성에 대한 표현은 파격적이다. 또한 동성애나 변태적인 성에 대한 이해도 과거에 비해 관대해졌다. 어떤 의미에서 현대는 더 이상 성의 표현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 문제는 지극히 개인의 영역인 성의 대중화와 상업화이다. TV, 영화, 컴퓨터, 스마트폰 등 뉴 미디어의 등장은 왜곡된 성의 표현을 거의 무한대로 대중화시킨다. 지극히 현실적이고 개인적인 성이 노골적이고 환상적인 세계로 이전한다. 현실과 환상의 구분이 사라진 포스트모던적인 ‘하이퍼-리얼리티’(hyper-reality) 속에 성이 잔류하게 된 것이다. 그로써 과거의 도덕적, 윤리적 규범들은 낡은 것이 되었고 조소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성에 대한 인식과 태도의 변화는 성적 표현과 행위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요구하고 있다. 발목과 허벅지의 차이는 더 이상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성적 쾌락이 우리의 정신을 황폐시키도록 허락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에로스, 그 빛과 그림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