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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생각의 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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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훈 Nov 02. 2020

죄와 벌

타인에게 무심한 한 우리는 모두 죄인이다.

성서에서 말하는 죄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의 죄는 기독교적 원죄의식을 초래하였다. 그렇게 인간은 악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뱀의 모습을 한 사탄을 마음속에 품게 된다. ‘죄를 저지르는 것은 인간이고, 용서하는 것은 신의 일이다.’(To err is human, to forgive is divine.) 인간은 죄에 대한 회개를 통해 신의 용서를 구한다. 인간은 어차피 죄인의 운명이고 그 죄를 사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전능한 신이기 때문이다. 아담의 교만으로 인간은 삶, 노동의 고통, 그리고 죽음의 벌을 받아야 했고, 바벨탑으로 인류는 언어의 혼란을 겪는다. 그리고 구세주 예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류는 죄에서 구함을 받는다.  


참회 그리고 형벌    


죄는 세속의 범죄, 도덕적, 윤리적 규범에 반하는 죄악, 그리고 신의 뜻에 반하는 종교적 죄업 모두를 포함한다. 범죄는 법으로, 도덕적 죄악은 세상의 비난이나 양심의 가책으로, 종교적 죄는 신의 섭리로 처벌을 받는다. 세 가지 모두의 공통점은 죄에는 반드시 벌이 따른다는 사실이다. 인류의 역사는 죄와 벌의 역사일지 모른다. 서양세계는 기독교적 죄의 역사로 시작된다. 동생을 죽인 성경 속의 카인은 인류 최초의 살인자였다. 그 카인의 후예들인 인류는 역사 속에서 무수한 살인을 범한다. 전쟁은 역사가 살인을 정당화하는 수단이었다. 고고학의 발견에 따르면 인류는 언어를 사용해 서로 의사를 교환할 수 있게 된 50만 년 전, 원시시대부터 전쟁이라 할 수 있는 집단 간의 싸움을 시작했다고 한다. 전쟁과 살육의 역사는 그렇게 오랜 연원을 가지고 있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인류가 시작된 이래 전쟁이 없었던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고 말한다. 공식적인 통계는 아니지만 2차 대전이 끝난 1945년부터 1990년까지 지구 상에서 죽고 죽이는 전쟁이 없었던 날이 3주 남짓 밖에는 되지 않는다고 하니 가히 전쟁과 함께 날이 밝고 날이 저문다.

  

전쟁을 통한 지배는 필연적으로 잔인한 억압과 박해를 수반한다. 죄가 또 다른 죄를 낳는 것이다. 14세기 중앙아시아에 대 제국을 건설한 티무르는 가혹한 정복자였다. 빼앗은 땅의 모든 것을 철저히 파괴하고, 저항하는 도시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 죽여, 사람들의 잘린 목으로 탑을 쌓을 정도였다. 그는 동방의 명나라 정벌을 위한 전쟁에 나섰다가 열병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티무르 제국은 그의 죽음과 함께 무너진다. 16세기 영국 작가 크리스토퍼 말로(Christopher Marlowe)의 희곡 ‘탬벌레인 대왕’(Tamburlaine the Great)은 티무르에 관한 이야기로 세상의 권력을 넘어서 신의 위치에까지 오르려 했던 한 인간의 몰락을 그리고 있다. 인간의 잔인성과 오만에 대한 신의 형벌이다.

  

나르키소스는 너무 아름다웠다. 그리고 모두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그들의 관심과 사랑이 싫었다. 숲 속의 님프 에코는 그를 너무 사랑하지만 그의 냉대에 지쳐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Nemesis)에게 간절히 기도한다. “그도 누군가를 사랑하게 해 주세요. 하지만 그 사랑을 이루지는 못하게 해 주세요.” 나르키소스는 에로스의 화살을 맞고 쓰러진다. 그리고 호수에 비친 자신을 본다. 그리고 사랑에 빠진다. 영원히 이룰 수 없는 사랑의 형벌. 다른 사람들의 아픔에 무심했던 나르키소스는 그렇게 이기적인 인간에 대한 벌의 상징이 되었다.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는 천형(天刑)을 의미한다. 천형, 하늘의 형벌. 14세기 유럽을 휩쓴 흑사병을 사람들은 인간이 지은 죄악에 대한 하늘의 형벌이라고 생각했다. AIDS는 현대의 천형이라 불린다. 왜 우리는 질병이나 재앙을 천벌로 인식하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 모두가 죄인이라는 종교적 인식에 비롯된다. 죄와 벌, 그것은 오랜 인간의 역사에 늘 함께 존재해온 명제였다.         


변화하는 죄의 개념    

  

죄의 개념은 시대에 따라 변한다. 과거의 죄가 지금의 죄는 아닐 수 있다. 죄의 변화는 사상의 변화, 삶의 변화와 통한다. 과학의 발전으로 많은 것들이 밝혀졌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생각에 반대하는 것은 신의 섭리를 거스르는 중대한 범죄였다.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진화에 의해 발전되어 온 것이라는 주장은 신성모독에 다름 아니었고, 그것은 화형에 처해질 중대한 범죄였다. 하지만 지동설과 진화론은 오늘날 상식이다. 18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수음(masturbation)은 사람을 허약하게 하거나 정신병의 원인이 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물론 이러한 생각의 뿌리는 기독교의 교리에 있었다. 부모들은 아이들의 수음을 막기 위해 잠옷의 소매를 침대보에 붙여 꿰매고, 발목을 묶어두거나 심지어 두꺼운 수건 등으로 기저귀를 채우기도 했다. 정액에 작은 아이가 들어있다는 잘못된 인식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가톨릭에서는 한 때 수음이 강간보다도 더 나쁜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 이유는 강간은 수정(受精)이라도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현대의 상식으로는 동의하기 어려운 죄의 개념이다.

  

이 외에도 우리 사회는 성적인 욕망과 관련해 많은 제약을 두어 왔다. 대표적인 것이 동성애, 혼전관계 그리고 피임이다. 특히 피임의 경우는 건강에 좋지 않다는 의학적 입장을 고려한 것이었는데, 현대의 의학은 금욕이 피임 못지않게 육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말하고 있다. 특히 동성애는 오늘날에도 많은 편견이 지속되고 있지만, 유전적 영향이 크다는 측면에서 과거처럼 부도덕이나 죄악으로 여기지 않게 되었다. 반대로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던 행위가 오늘날 죄로 간주되는 것도 있다. 과거 사회에서 남녀 간의 차별은 죄가 아니었다. 남성 중심의 가치관이 옳은 것으로 인정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개발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자연파괴도 상당 부분 용인되었다. 인종차별이나 타 종교에 대한 배타적 차별도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여성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이해와 자연의 파괴로 인한 재앙들이 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새로운 인식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시간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이 세상에 절대적인 것은 없다. 17세기 영국의 시인 존 밀턴(John Milton)은 신과 사탄 사이의 전쟁을 그린 ‘실낙원’(Lost Paradise)을 저술했다. 밀턴은 철저한 청교도였다. 기독교의 교리를 누구보다도 강하게 주창했던 사람이었다. ‘실낙원’도 그러한 그의 믿음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러나 후대의 독자들은 주인공 아담보다도 사탄을 더 사랑했다. 이길 수 없는 전쟁을 벌인 사탄, 용서받을 수 없는 존재. 독자들은 사탄을 통해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보았다. 죄인일 수밖에 없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그를 통해 신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을 넘어 자유를 향한 저항의 정신을 보았던 것이다. 신에 대한 도전을 자아와 자유를 찾고자 하는 인간의 저항으로 생각하는 시대에 죄의 개념은 변화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죄의 예언      

  

프랑스 소설가 빅토르 위고(Victor-Marie Hugo)의 소설 ‘레미제라블’(Les Miserables)은 예언적이다. 주인공 장발장은 추위에 떨며 굶주리는 일곱 조카들을 위해 빵 한 조각을 훔친다. 그리고 그 죄로 19년 동안 감옥 생활을 한다. 지은 죄에 비해 가혹한 형벌이었다. 감옥에서 나온 장은 자신에게 음식과 잠자리를 준 마리엘 신부의 성당에서 은촛대를 훔친다. 신부는 그를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오히려 훔친 촛대를 선물로 내어준다. 장의 인생이 변화하는 순간이다. 그것은 죄에 대한 정반대의 두 가지 태도를 보여준다. 그리고 현대가 만들어낸 수많은 범죄와 그 범죄에 대한 처벌이 얼마나 비인간적인지를 되돌아보게 한다. 이 풍요로운 자본주의 세상에서 아직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는가.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죄인이 되어가고 있는가. 생존을 위한 범죄는 얼마나 인간성을 파괴하는가! 그리고 벌은 또 얼마나 가혹한가. 오늘날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범죄를 저지르는 수많은 장발장들을 본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은촛대를 내어줄 수는 없는 가 자문해 본다.

  

영국의 여류 소설가 마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은 시체의 살과 뼈를 이어 붙여 만들어진 괴물과 그 괴물을 만든 과학자 프랑켄슈타인의 이야기이다. 그는 창조자가 되었으나 자신의 창조물을 보는 순간, 그 끔찍한 모습에 공포와 혐오감을 느낀다. 그리고 자신의 창조물을 버리고 달아난다. 책임지지 못할 생명의 창조주, 그는 신의 영역을 침범했을 뿐 아니라 생명에 대한 무책임의 죄를 저지른다. 인간의 존엄성, 생명의 존귀함에 눈 감는 비열한 범죄,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도외시하고 자신만의 안위를 살피는 비겁한 인간들, 오늘날의 프랑켄슈타인을 어찌할 것인가. 2012년 1월 13일, 4200여 명을 태운 이탈리아 유람선 콩코르디아호가 이탈리아 서해안 토스카나 부근을 지나다 암초와 부딪혀 침몰했다. 선장 세티노는 승객들의 구조를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혼자 살기 위해 도망을 쳤다. 이탈리아 검찰은 세티노 선장에 대해 2,697년의 징역형을 구형했다. 생명을 경시한 무책임성에 경종을 울리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깊은 종교적 죄의식이 남아있다. 우리 모두 죄인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의 삶은 끊임없는 자기혐오와 불안감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죄는 인간에 대한 무한한 연민을 남긴다. 신에게 버림받고, 율법의 굴레에서 살아야 하고, 늘 도덕적인 체 위장하고, 그 많은 법률을 지켜야 하니까. 그래야 죄인이 되지 않을 테니까. 종교의 경전 속에 있는 죄, 그리고 역사 속의 수많은 죄와 그에 따른 벌들은 잠시 미루어두자. 이제 오늘의 세상에서 가장 인간다울 수 있는 삶의 모습을 찾아야 한다. 최소한 삶 속에서 벌어지는 생존을 위한 죄를 어찌할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필요한 때이다. 여지없이 파괴되는 인간성의 회복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Bernard Shaw)는 이렇게 말한다. “인류에 대한 최대의 죄는 그들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무관심한 것이다.” 죄에는 벌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따듯한 마음, 긍휼한 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타인에게 무관심한 한 우리 모두 죄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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