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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훈 Nov 04. 2020

자살, 절망의 끝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목숨을 끊게 하는가?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는가? 죽음이라는 극단의 선택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말처럼 인간에게는 생명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려는 죽음의 본능(타나토스, Thanatos)이 있을지 모른다. 태어난 것이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었으니 죽음만이라도 내가 선택하자는 것일까? 나의 존재를 멸절하려는 그 절박한 심리는 과연 나의 의지대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일까?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죽음의 신 타나토스는 ‘잠’의 신(히프노스)의 형제이고, ‘밤’의 신(니크스)의 자식이다. 죽음이 영원한 잠이고, 밤의 암흑 속에 묻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오히려 평화일지도 모른다. 삶의 모든 고통과 고뇌로부터 벗어나는 평화,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동경하는 것일까. 그러나 프로이트에 따르면 모든 에너지의 원천인 본능에는 죽음의 본능에 맞서는 생의 본능이 있다고 한다. 생의 본능이 생성과 이타적인 사랑의 감정인 반면 죽음의 본능은 파괴와 증오를 이끈다. 사실 죽음에 대한 동경은 언제나 파괴적일 수밖에 없다. 그 어떤 의미에서도 죽음은 삶의 종말이다. 죽음 이후의 세계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 이 세계는 끝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자살의 충동은 삶의 현실을 파괴하려는 욕구이다. 영국의 정신분석학자 멜라니 클라인(Melanie Klein)은 우리의 삶은 생의 욕망과 죽음의 욕망이 끊임없는 갈등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그 갈등을 용인하는 법을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삶은 언제나 죽음과의 갈등 속에서 진행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고통과 고뇌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죽음에 이르는 병-절망    


덴마크의 실존주의 철학자 키르케고르(S. A. Kierkegaard)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책에서 인간을 무한성과 유한성, 시간성과 영원성, 자유와 필연이 혼재된 존재라고 말한다. 그렇게 인간의 본성은 상호 모순적인 요소로 구성되어 전혀 다른 속성을 지닌다. 동물적 본성에 사로잡히기도 하고 신에 근접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 어울릴 수 없는 극단 사이를 오가며 인간은 자신의 본질에 대한 불확실성에 사로잡힌다. 그에 따르면 죽음에 이르는 병은 ‘절망’이다. 그리고 그 절망은 자신을 창조한 신과의 관계를 상실하는 것이다. 유신론적 실존주의자로서 키르케고르는 육체적 죽음이 아닌 영원한 생명의 상실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절망’이 신과의 단절에서 오는 자신의 상실이라면 그것은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의미를 갖는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심,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과 불안, 그것이 현대인들이 겪고 있는 보편적인 마음의 질병이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인가? 이 복잡하고 시끄러운 세상에서 난 어디에 서있는 것일까? 기계처럼 단조롭고 모든 것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이 삭막한 세계에서 나는 의미 있는 존재일 수 있는가? 자신의 존재에 대한 확신의 결여,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오는 피할 수 없는 절망감, 그것이 삶에 대한 의지를 파괴하는 가장 큰 요소임을 결코 부정할 수 없다.       

미국의 노벨상 수상작가 헤밍웨이(Ernest Hemingway)는 엽총의 총구를 입에 물고 격발해 자살했다. 그는 62년의 생을 그렇게 마감했다. 그의 자살을 두고 여러 가지 추측들이 난무했다. 창작력의 고갈, 우울증, 심지어는 발기부전에 대한 열등감 등 가십성 보도들이 지금도 계속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유서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나의 모든 희망이 사라졌다. 그것은 천부적인 재능이 이미 사라졌다는 것을 뜻한다. 나의 찬란했던 삶이 끝났으니, 완벽한 나를 지키려면 반드시 스스로 소멸해야 한다.” 죽음을 앞두고 쓴 유서마저 허구였다고 말하는 것은 그를 너무 위선적으로 보는 시각이 아닐까. 어떻든 그의 말대로라면 헤밍웨이는 결국 작가로서의 존재에 대한 자신감의 상실에서 극단의 선택을 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외로움, 분노와 자기혐오    

현대인은 외롭다. 혼자 있어 외롭고 함께 있어도 외롭다. 그 고립감의 뒤에 사회에 대한 불만, 타인에 대한 불신 그리고 자신에 대한 혐오가 자리 잡고 있다. 우리는 마음속의 많은 번민을 표현하지 못한다. 누구와도 소통하지 못하는 단절의 벽 앞에 서있다. 그리고 삶의 의미를 상실한다. 가족관계의 파괴는 외로움을 가중시킨다. 의학의 발전에 따라 생명은 연장되어 가지만 삶의 이유를 찾지 못한다. 이 불통의 시대, 무의미의 사회에서 자살은 고통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출구가 되어가고 있다. 외로움에 빠진 이들은 무력감과 함께 분노에 사로잡힌다. 그 누구에게도 풀어낼 수 없는 그 분노가 결국 자신을 향한다. 그렇게 자기혐오에 빠지고 스스로 무의미한 생을 마감한다. 우울증을 비롯한 정신질환은 대화의 단절에서 오는 외로움, 그리고 분노와 자기혐오에서 비롯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프랑스 인상파 화가 반 고흐(Vincent Van Gogh)는 평생을 고통과 외로움 속에 살았다. 그는 심각한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고, 심지어 자신의 귀를 자르는 광적인 행동을 저지른다. 실연과 가난, 그리고 외로움으로 그의 삶은 파괴된다. 그리고 권총으로 목숨을 끊는다. 최근 그의 죽음이 자살이 아니라는 내용의 책이 나왔지만 고흐는 언제나 버거운 삶의 무게를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예술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불만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임종의 자리에서 “나는 늘 죽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한다. 그는 삶을 사랑하지 않은 예술가였다. 그에게 있어 삶은 언제나 고통 그 자체였다. 고흐의 외로운 삶과 죽음에 대해 수많은 책이 나왔지만, 미국 가수 돈 맥클린(Don Mclean)의 노래 '빈센트‘(Vincent)만큼 그의 삶을 시적으로 묘사한 것은 없는 것 같다. 고호의 그림 ’ 별이 빛나는 밤에‘(Starry, Starry Night)로 시작하는 노랫말 중에 이런 표현이 있다. “별이 빛나는 밤, 연인들이 늘 그러하듯 당신은 삶을 버렸죠. 하지만 난 당신에게 말할 수 있어요. 이 세상은 당신처럼 아름다운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그는 외로움과 고통 속에서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삶의 끈을 놓아버렸던 것이다.   


외로움 속에서 현대인들은 사이버의 세계에 빠진다. 트위터와 페이스북. 그 수많은 접속과 네트워크의 시대. 그것은 무한한 대화와 소통을 약속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속에서 타인들과 교류하고 자신의 분노, 외로움, 무기력을 거침없이 드러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사이버의 세계는 우리를 외로움에서 벗어나게 해주지 못한다. 오히려 외로움을 가중시킨다. 폴란드 출신 사회학자로 영국 리즈대학 명예교수인 바우만(Zygmunt Bauman)은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원제: 44 Letters from the Liquid Modern World)에서 사이버의 열린 공간 속에서 개인의 프라이버시는 해체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만의 비밀이 개방된다. 네트워크의 세계는 소통을 강화하고 유대를 형성하는 것 같지만 비밀이 없는 소통과 유대는 오히려 상호 간의 관계를 악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이버 세계에서 조차 외로움을 느낀다. 나와는 관계없는 사람들에게 비밀을 드러내고 의미 없는 이야기를 주절거리는 나의 모습을 보며 현대인은 ‘군중 속의 고독’을 떠올린다. 그렇게 사이버의 세계도 외로움을 해소시켜주지는 못하는 것이다.    


수많은 자살들    


사회학의 기초를 놓은 것으로 평가되는 프랑스의 사회학자 뒤르켐(Emile Durkheim)은 자살을 세 가지로 분류한다. 우울증, 개인적 번민과 고통, 외로움 등에 의해 일어나는 ‘이기적 자살,’ 사회의 강압과 환경적 요인에 의해 개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행해지는 ‘이타적 자살,’ 그리고 사회적 변혁과 혼란에서 기인하는 ‘아노미적 자살’이 그것이다. 물론 현대사회의 복잡성과 다양성을 고려할 때 자살을 단지 이 유형만으로 분류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자살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회, 그리고 자신의 내부에서 벌어지는 갈등이 늘 복합적으로 작용함으로써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화와 역사, 문학 속에 등장하는 몇 가지 자살의 모습을 소개한다.    


자살 하나: 고대 로마의 여인 루크레티아(Lucretia)는 정숙하고 현명한 아내였다. 그러나 그녀의 정숙함을 혐오했던 악인 타루퀴니우스에게 강간을 당한다. 그녀는 아버지와 남편 앞에서 그 사실을 고백하고 복수를 부탁한다. 그리고 단검으로 자신의 목을 찔러 자살한다.     


자살 둘: 1978년 미국에서 909명의 사이비 종교 신자들이 집단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소위 존스타운(인민사원) 집단자살 사건이다. 제임스 존스(James Jones)라는 목사가 남미 가이아나 조지타운 외곽의 황무지를 빌려 존스타운이라는 집단 수용시설을 만들고 자신을 신격화하는 사이비 종교집단을 이끌었다. 그 수용시설에서 탈출한 사람들에 의해 그곳의 가학행위가 전해지자 하원이 중심이 되어 조사단이 파견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그들 모두 광신도들에 의해 살해되었기 때문이다. 종말을 예감한 존스는 그곳에 있던 900여 명의 신도들에게 죽음의 명령을 내린다. 그렇게 역사상 가장 끔찍한 집단자살의 비극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종교적 광신과 광인의 미혹이 부른 참사였다.     


자살 셋: 일본 작가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우국’(憂國)은 국가에 대한 충성과 우정 사이에서 번민하던 한 젊은 장교 부부의 자살을 그리고 있다. 주인공 중위의 친구들이 내란을 모의하다가 체포된다. 그는 친구들을 조사하고 처형해야 하는 입장에 놓인다. 번민하던 그는 어느 날 아직도 신혼의 꿈에 젖어있던 아름다운 아내와 조용한 저녁식사를 마치고 마지막 사랑을 나눈다. 그리고 군도로 할복한다. 그가 죽자 그의 아내도 남편의 뒤를 따라 단도로 자신의 목을 찔러 자살한다. 이렇듯 자살은 다양한 원인에서 초래된다. 개인적 고통, 종교적 광기, 국가에 대한 충성과 개인의 의지 사이의 갈등, 모든 자살은 제각기 이유를 갖는다.   


풍요 속의 가난한 죽음    

오늘날 우리는 물질적 풍요라는 자본주의의 환상에 빠져 있다. 그러나 이 외형적인 풍요로움 속에 많은 이들은 좌절을 느낀다. 무능력과 무기력 그리고 상대적인 박탈감. 현대는 무수히 많은 자살의 이유를 제공한다. 급속한 산업화와 전통적인 가치의 파괴가 물질 숭배에 빠진 현대인들의 정신을 나약하게 만든다. 작은 행복을 찾으려는 소박한 노력마저 무의미하게 만드는 오늘의 삶이 생명의 가치와 존엄성마저 사라지게 만들고 있다. 그렇게 자살의 충동은 현대인의 가까이에 있다. 가난은 자본주의의 가장 잔인한 질병이다. 러시아의 소설가 고골(Nikolai Vasilevich Gogol)의 ‘외투’는 가난한 하급 공무원 아카키 아카키예비치의 이야기이다. 늘 입고 다니던 낡은 외투를 더 이상 입지 못하게 되자, 그는 새 옷을 살 결심을 한다. 그리고 박봉을 쪼개 외투를 살 돈을 모은다. 그 순간 그에게 목표가 생긴다. 마침내 외투를 산 그는 행복감에 빠진다. 그러나 그 다음날 노상강도에게 외투를 빼앗기고 만다. 그는 실의에 빠져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다. 그 후 그는 유령이 되어 나타난다. 그리고 밤마다 거리에서 사람들의 외투를 빼앗는다. 고골의 외투는 가난한 사람들의 꿈이다. 그리고 그 꿈의 상실은 죽음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궁핍함 속에서 죽어간다. 가난이 일상이던 과거가 아니라 풍요로움과 낭비와 쾌락이 흐르는 화려한 거리에서의 외로운 죽음이다. 


보도에 따르면 한국의 자살률이 최근 10년 간 2 배 가까이 증가하고, OECD 국가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자살률을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 수많은 이유로 자살이 전염병처럼 번지고 있다. 슬픈 우리의 자화상이다. 자살의 원인은 다양하고 복잡하지만 결국 삶에 대한 의미의 상실에서 기인한다. 한 인간이 살 이유를 포기하는 사회는 얼마나 삭막한가. 자살은 정신병적 병리현상으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그리고 사회의 문제만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도 다양한 동기가 있다. 이제 사회 전체가 절망 속에서 자신을 상실하는 자살이라는 잔혹한 현상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해야 한다. 자살의 외적 원인만이 아니라 자살이란 극단적인 행위로 목숨을 끊은 불행한 이들의 마음을 살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죽음에 우리가 어떠한 역할을 했는가에 대한 반성이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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