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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훈 Nov 05. 2020

늙어가는 사람들에게

늙어서 현명해지길 바라지 마세요

“늙는다는 것은 바쁜 사람은 결코 가질 수 없는 나쁜 습관이다.” 현대 프랑스의 지성 앙드레 모루아(Andre Maurois)는 자신의 일에 열심히 몰두하면 나이도 잊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나이는 그저 숫자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태도도 그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늙는다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우울한 일이다. 더 이상 실패를 통해 배울 기회를 갖지 못한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사람들은 나이가 지혜를 가져다주는 것으로 믿었다. 한 때 중국의 권력자들은 모두 칠 팝 십대의 노인들뿐이었다. 나이가 주는 현명함을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까지 국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중국의 대표적 정치가 저우언라이(周恩來)는 프랑스 혁명이 좋은 일이었느냐는 서양기자의 질문을 받자, 잠시 생각한 뒤, “아직은 말하기 이르다.”라고 대답하였다. 200년도 더 지난 사건을 아직도 더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모양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현명해진다고 믿어서일까?    


늙음, 그 피할 수 없는 우울함  


시간이 지날수록 현명해질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시간은 모든 것을 변화시키거나 파괴한다는 것이다. 성장의 과정도 그것이 지나가면 결국 소멸을 맞이하는 것 아니겠는가. 자연계의 모든 변화는 질서에서 무질서의 세계로 이전한다. 쇠는 녹슬고, 연기는 흩어지고 나무는 죽어 썩는다. 엔트로피(entropy)의 법칙이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이미 사용된 젊음은 다시 돌이킬 수 없다. 그래서 젊음을 그리워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는 하지만 현명한 태도는 아니다. 영국의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The Picture of Dorian Gray)은 늙음에 대한 저항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를 보여준다. 자신의 초상화를 보고 그 아름다움과 젊음에 반한 도리언은 초상화 속의 모습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어 한다.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그의 바람은 이루어졌다. 어느 순간 자신을 대신해 초상화가 늙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 현실 속의 자신은 늘 젊음의 아름다움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영원한 젊음을 얻은 그는 타락과 방종의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죄를 저지를수록 초상화 속의 그는 추하고 사악한 모습으로 변해간다. 마침내 도리언은 그림 속의 자기를 저주하며 그의 심장에 칼을 꽂는다. 그 순간 초상화 속의 그는 젊은 시절의 아름다웠던 자신으로 변한다. 그리고 심장에 칼이 꽂힌 채 비참한 모습으로 죽어가는 현실 속의 늙은 자신을 발견한다. 그 어떤 것으로도 시간이 초래하는 변화를 막을 수 없다. 그렇게 늙음은 어쩔 수 없이 다가오는 것이다.           


마음의 시계    


나이가 들어갈수록 우리는 철학적이 되는가? 젊은 시절의 열정, 활력 그리고 무모함이 이제는 현자의 지혜로 대체되어 안락의자에 앉아 사색하는 철학자의 모습으로 변해가는 것인가? 기억하라. 그 치열한 현실의 삶을 철학적 사색으로 대신할 수 없음을. 로미오는 말한다. “철학이 줄리엣을 만들 수 없다면 그따위 철학은 없애버려라.“ 늙는다는 것은 행동보다는 생각을 더 많이 하는 것이다. 약해진 근육을 사용하는 것보다 더욱 교활해진 머리를 쓰는 것이 더 편한 일이지 모른다. 그렇게 늙어 가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육체적 힘이 쇠잔해지는 것은 늙음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이다. 누구나 겪어야 할 노화의 과정이다. 근력이 떨어지고, 민첩성이 둔화되고, 지구력이 약화되는 순간, 우리는 늙어 감을 깨닫는다. 그러나 육체의 나약함을 섣부른 지혜로 보상하려하지 말아야 한다. 나이가 지혜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이 들어 흔히 빠지는 노탐(老貪)은 현명함을 잃은 것에 다름 아니다. 육체의 힘이 쇠퇴함을 인정할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노년의 철학이 아니라 정신의 새로움을 찾는 것이다. 마음의 신선함을 유지하도록 애써야 한다. 육체적 나약함이 마음의 문제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1979년 하버드 대학 심리학과 엘렌 랭어(Ellen Langer)교수는 늙음의 정체를 밝히는 아주 독특한 실험을 한다. 칠팔십 대 노인들을 대상으로 엘렌 교수는 정확히 20년 전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마을을 만들고 그들을 20년 전의 상황에 맞추어 생활하게 한다. 결과는 놀라웠다. 실험에 참여한 노인들의 신체지수와 지능이 20년 전 50대의 그것으로 변화되었음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마음의 시계를 돌려 노년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음은 노인들이 배워야 할 건전한 교훈이다. 나이 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젊음의 활력을 섣부른 지혜로 대신하려 하지 않고,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젊은 시절로 되돌리고자 노력하는 것, 그것이 노년의 지혜이다.        

과거-그 아름다운 추억     


“누구도 같은 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다. 두 번째 발을 담글 때, 강은 같은 강이 아니고 그도 같은 사람이 아니다.”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Heracleitos)의 말이다. 세월은 흐르는 강물과 같다. 오늘의 우리는 어제의 우리가 아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도 더 이상 옛 것일 수 없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과거를 동경하고, 과거에 집착하는 것.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늙게 하는 가장 큰 적이다. 톨스토이의 소설 ‘어느 말 이야기’는 잡종으로 태어난 한 얼룩말의 이야기이다. 주인공 홀스또메르는 늙고 병든 모습으로 자신의 슬픈 과거와 경주마로서의 화려했던 옛날을 회상한다. 얼룩빼기라는 이유로 다른 말들의 조롱을 받고 무리로부터 소외된 그는 첫사랑마저 멋진 순종 말에게 빼앗긴다. 그리고 심지어 거세를 당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강인함을 알아본 한 공작에게 뽑혀 그의 마차를 끌게 되면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그렇게 최고의 순간을 맞는다. 하지만 다른 남자와 도망한 애인을 추적하던 공작이 가혹하게 그를 몰아댄 탓에 홀스또메르는 병을 얻는다. 병들어 쓸모없어진 그는 자신이 태어난 옛 마사로 돌아오게 되고 망연히 자신의 과거를 회상한다. 그 슬픔과 화려함을 넋두리처럼 풀어낸다. 오늘의 노년들 속에서 우리는 처량한 홀스또메르를 본다. 젊은 말들의 조롱,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옛 주인, 죽음을 기다리는 절망의 순간. 홀스또메르는 그렇게 과거를 가슴에 품고 들짐승의 먹이로 죽어간다. 과거의 화려함을 떠올리는 홀스또메르의 모습은 그 자체가 하나의 슬픔이다. 과거의 추억들을 끄집어내어 반추하고, 늙고 지친 자신의 모습을 한탄하는 홀스또메르. 그렇게 우리는 과거와 함께 늙어간다. 과거는 늙어가는 자들의 유일한 위안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거가 없는 현재는 없다. 독일 작가 비프케 로렌츠(Wiebke Lorenz)의 소설 ‘당신의 과거를 지워드립니다.’는 과거와 현재에 대한 우화적인 이야기이다. 주인공 찰리는 20대 후반의 여성이다. 방종하고 무의미한 삶에 회의를 느끼게 되었을 무렵, 그녀는 자신의 과거를 모두 지워버릴 기회를 얻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그녀의 삶은 과거가 없는 현재 속에 살게 된다. 그것은 혼란이었다. 지워진 과거로 인해 전혀 생소한 현재에 살게 되었지만 찰리는 과거의 모든 기억을 여전히 버리지 못한다. 자신이 기억하는 과거와 다른 현실, 과거의 작은 일 하나하나가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알아버린 순간 삶은 결코 행복할 수 없었다. 마치 미국 작가 워싱턴 어빙(Washington Irving)의 단편소설 ‘립 밴 윙클’(Rip Van Winkle)의 게으른 주인공처럼 술에 취해 잠들었다 깨어보니 20년의 세월이 흘러버린 그런 망연함에 빠지고 만다. 과거의 상실. 그것은 늙음보다 더 큰 상실일지 모른다. 삶의 과정에서 우리는 과거에 집착하지 않되, 과거를 잊어버리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비록 후회되고 지워버리고 싶은 어리석은 과거라 하더라도 그것이 오늘의 나를 존재하게 한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늙는다는 것은 과거를 잊는 것이 아니고, 현재의 삶을 과거의 거울을 통해 다시 비추어보는 여유로움을 얻는 것이다. 과거는 흘러간 강물만은 아니다. 그것은 늙어가며 반추할 아름다운 기억의 조각들이다. 마음속에 추억할 과거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이제 새로이 그 추억을 쌓아가야 할 젊은 말들을 바라보며 여유롭고, 흐뭇한 미소를 짓는 홀스또메르를 보고 싶지 않은가.                     


슬프지만 깊은 노년의 사랑    


늙는다는 것은 사랑의 종말인가? 19세기 프랑스 작가 모파상(Guy de Maupassant)의   여섯 번째 장편소설 ‘죽음처럼 강하다’는 인간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영원히 꺼지지 않는 사랑의 열정, 정염의 불꽃을 보여준다. 나이와 도덕을 초월한 사랑의 감정. 주인공 베르탱은 자신의 정부 아니의 딸을 사랑한다. 늙어가는 육체와 아직도 청춘을 유지하고 있는 욕망 사이에서 그는 괴로워한다. 아니는 자신의 딸을 사랑하게 된 베르탱의 고통을 알고는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늙지 않은 우리 마음의 잘못이에요.” 사랑의 마음은 세월과 무관한 것일까? 74세의 괴테는 19세의 울리케라는 소녀를 사랑했다. 15년 전의 그는 울리케의 어머니를 사랑하고 흠모했다. 괴테의 광적인 사랑은 창조적 열정으로 승화된다. 그의 ‘마리엔바트 비가(悲歌)’는 이루어질 수 없었던 사랑의 산물이었다. 남미 콜롬비아 출신의 노벨상 수상자 마르케스(Gabriel Garcia Márquez)는 80세가 가까운 나이인  2005년에 일본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잠자는 미녀’로부터 영감을 받아 아흔 살 노인이 십대의 소녀를 사랑하는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을 발표한다.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된 이 소설은 수많은 세월을 살아온 한 노인이 생애 처음으로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사랑에 나이가 무슨 상관인가. 그리고 사랑의 열정이, 그 간절함이 남아있는 한 더 이상 마음은 늙지 않는다. 슬프지만 깊고 아름다운 노년의 사랑이다.  


18세기 프랑스의 비평가 보브나르그(Luc de Clapiers de Vauvenargues)는 “노인의 충고는 겨울의 태양빛과 같다. 그것은 비추고 있을 뿐 따스함을 안겨주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그 창백한 빛이 따뜻함을 주지는 못할지라도 노년의 빛은 모두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주기도 한다. 그것은 ‘우리 모두 늙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르네상스 시대 프랑스의 사상가 몽테뉴 (Michel de Montaigne)의 말처럼 “늙음은 우리들의 얼굴에 보다도 마음에 주름살을 만든다.” 그리고 그 마음의 주름살 아래 우울함, 드러내지 못하는 지혜, 추억, 사랑이 아련하게 남아있을 것이다. 늙음을 탓하지 말라. 그것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세월의 흔적일 뿐이다. 이 세상 떠나는 날까지 현재의 내 모습을 사랑하라. 그리고 새로운 삶을 꿈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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