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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훈 Nov 13. 2020

톨레랑스, '너를 인정하는 것'

나는 당신의 말에 반대하지만, 당신의 말할 권리를 지키겠다.

관용, 타인의 권리를 인정하는 것


톨레랑스(Tolérance), 관용은 문명사회에서 가장 필요로 되는 미덕이다. 그래서 헬렌 켈러는 ‘교육의 가장 높은 결과는 관용’이라고 말했는지 모른다. 관용의 정신은 다른 사람들의 말과 행동의 자유를 인정하고 보호하려는 마음에서 생겨난다. 오래전 마드리드에서 내려진 판결은 관용에 대한 선명한 예를 보여주고 있다: 마드리드 경찰은 거리의 매춘부들이 지나치게 노출이 심한 옷을 걸치고 있어 양속을 해치고 있다고 판단하고 그들에게 의상을 바꿔 입도록 명령한다. 하지만 법정으로 간 이 사건의 판결은 달랐다. ‘그들의 옷은 일종의 유니폼과 같은 것이므로 그러한 의상의 착용을 허락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분명 일종의 관용이다.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지 않는 한 누군가의 행동을 규제할 수 없다는 자유주의 선언과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볼테르는 이렇게 말한다. “자신을 위해 생각하라.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럴 수 있는 권리를 누리게 하라.”     


우리 주변에는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강요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고 살아야 할지를 참견할 권리가 우리에게는 없다. 자신의 태도와 믿음을 남에게 강요할 권리도 또한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알게 모르게 타인의 행동에 간여하고 자신의 생각을 주입하려고 한다. 관용의 상실이다. 분열된 사회에서는 관용이 존재할 수 없다. 자신들의 생각만이 옳고, 상대의 생각은 무조건 틀렸다고 믿는 사회에서 관용을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다.     


관용이 사라진 사회의 증상은 불안정과 두려움이다. 자신들만의 사상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박해하여 획일적인 사상의 안정을 얻으려 한다. 그리고 마치 그것만이 타인을 오류와 왜곡에서 구하는 것인 양 생각한다. 그러한 행동의 뒤에는 바로 두려움이 있다. 1996년부터 2001년까지 아프가니스탄을 지배한 탈레반 정권은 무슬림의 교리를 자기들 식으로 해석하고 그것을 어기는 사람들을 탄압했다. 남자들은 모두 턱수염을 길러야 했고, 여성들은 부르카를 써서 얼굴을 가려야 했다. TV와 스포츠, 콘서트, 사진, 음악, 무용 등 모든 문화 예술 활동이 금지되었다. 자유로운 사상이 종교적 억압에 대한 반발의 계기를 만들 것을 두려워한 까닭이었다. 그들은 여성들로 하여금 교육과 직장을 포기하고 집에만 머물게 했다. 그들은 여성들의 자유조차 두려워했던 것이다. 한편 다른 종교에 대한 억압도 가혹했다. 힌두교도들은 가슴에 노란색 배지를 달아야 했다. 마치 나치 정권이 유대인들에게 유대교의 표상인 다윗의 별을 달고 다니게 한 것과 다름없었다. 2,000년을 비단길 위에서 여행객들에게 선한 미소를 전했던 바미안 석불들도 찰나의 순간 먼지로 변하고 말았다. 두려움이 간다라 미술을 대표하는 인류의 위대한 유산마저 파괴하고 말았던 것이다.     


세대 간의 갈등도 관용을 말살하는 이유가 된다. 기성세대는 자신들이 오랫동안 믿어오고 소중히 했던 가치들에 도전하는 젊은 세대를 관용의 정신으로 대하지 못한다. 그렇게 모든 세대는 새로운 세대를 두려워한다. 그들이 좋아하고 원하는 것, 그들이 하고자 하는 모든 행위들에 대해 의혹의 눈길을 보낸다. 그렇게 불신의 골은 깊어지고, 긴장은 고조되고, 서로 간의 소통은 사라진다. 관용보다는 경계하고 교정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것, 그것은 자신들의 세계가 무너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의 결과였다.        


지금 우리는 관용을 상실한 시대에 살고 있다. 주변을 돌아보라. 나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우리는 무엇이라 부르고,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특히 정치의 영역에서 우리는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다. 좌파는 우파를 부패의 원조라 부르고, 우파는 좌파를 새로운 부패의 근원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서로를 향해 손가락질한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아웃사이더가 조금이라도 한 편에 비판적이면 금세 낯빛을 바꾸고 비난을 퍼붓는다. 차라리 입을 닫으면 기회주의자라고 비웃는다. 참 기 막히는 오만과 편견의 시대이다. 노벨평화상을 받은 미국의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1910년 프랑스 소르본 대학에서 한 연설의 한 구절을 인용한다.     


“한 국가의 성공을 위해서는 강한 확신과 함께 확신의 차이에 대한 관용이 필요합니다. 양심과 지성이 저해받지 않고, 건전한 성장의 여지를 얻고자 하면, 종교적, 정치적, 사회적 의견의 차이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차이로 인해 생기는 심각한 내부의 증오심은 자신의 믿음에 대한 열정이 아니라, 종교적이든 반종교적이든, 민주적이든 비민주적이든, 그것은 어두운 편견의 표시일 뿐입니다. 그러한 편향적 믿음은 무수히 많은 국가를 몰락으로 이끈 요인이 되어온 것입니다.”     


그의 연설이 있은 지 11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세상은 여전히 그러한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 하긴 그의 조국 미국마저도 심각한 분열의 정치를 경험하고 있으니 관용의 정신은 쉽게 얻을 수 없는 미덕일지도 모른다. ‘관용은 생각 없이 말하는 사람들을 용서하는 능력’이라는 말이 있다. 자만과 편견에 취해서 아무 말이나 뱉어내는 사람들은 자신이 진정으로 믿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를 수도 있다. 그저 먼저 외치고 주장해서 자신의 존재만을 드러내고 싶은 유치한 인간들은 자신의 한 말에 대해 끊임없이 핑곗거리를 만들어낸다.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들의 말과 주장을 인정해주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자유의 역설’이라는 말이 있다. 어떠한 제약도 없는 자유는 결국 더 큰 제약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관용의 역설’도 존재한다. 무한한 관용은 관용의 소멸을 초래할 수 있다는 개념이다. 단지 이기기 위해 사실의 확인도 없이 상대를 비난하고,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남을 중상모략하는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고 서로  합의를 이끌어내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다. 주변을 돌아보면 그런 사람들이 꽤 많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것은 지위의 고하나 교육 수준의 높고 낮음과는 전혀 무관하다. 그것은 삶의 가장 기본적인 도리를 모르거나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앨버트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한다. ‘표현의 자유는 법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처벌 없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으려면 인류 전체가 관용의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  하지만 상대의 관용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거나, 상대를 완전히 무시하는 말과 행동에까지 무한한 아량을 베풀기는 불가능하다. ”용기는 소수에 속해있을 때 오고, 관용은 다수에 속해있을 때 온다. “라는 말도 있다. 아량을 베푸는 것은 강자의 일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상대의 요구가 부당함에도 강자여서 일방적으로 아량을 베풀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관용의 진정한 의미가 드러난다. 그것은 상대의 생각과  말에 반대하고 심지어 혐오한다 하더라도  그들의 그럴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다. 관용은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용은 깊은 자기 성찰에서 비롯된다. 남의 주장과 행동을 넓은 마음으로 품어주는  것과 더불어 자신의 말과 행동에 오류가 없는지, 그것이 상대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를 진지하게 고려할 때 진정한 관용이 가능한 것이다. 관용은 타협처럼 상대적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지 않고 마치 시혜를 베풀 듯이 던지는 행위는 관용의 정신과는 다르다. 중세 말기 기독교는 서구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들이 정해놓은 세상과, 그들이 제시하는 섭리에 따르지 않는 것은 모두 죄악이었다. 그러한 종교적 오만에 대한 반기가 종교개혁이었으나 종교적인 학대는 계속되었다. 불관용의 기독교 교회를 무너뜨린 것은 종교개혁이 아니었다. 인간 중심의 세상, 인간의 이성과 자유 의지를 발견한 르네상스와 계몽주의가 기독교의 정신인 사랑, 그리고 톨레랑스의 정신을 되살려 놓았던 것이다. 결국 그것은 인간 스스로 종교의 도그마에서 벗어나 자신대해 깊이 성찰한 결과였던 것이다.     


관용은 기독교적 자비와 종종 혼동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 나오는 라스콜리니코프는 존재할 이유가 없다고 믿은 악덕 사채업자 노파를 살해하고 법의 심판을 받는다. 노파를 살해하고 방황하다가 자수한 그에게 판사는 8년의 형을 선고한다. 살인이라는 죄에 비해 관대한 형량이다. 판사는 이 젊은이의 삶과 그의 미래에 대해 깊은 고심을 했음이 틀림없다. 그래서 처벌보다 자비를 베푼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서도 판사로 가장한 포셔는 샤일록에게 법의 ‘정의’ 보다는 ‘자비’를 베풀 것을 간청한다. 하지만 용서와 자비는 관용과는 다르다. 관용은 베푸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권리를 존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을 돌아보는 겸손함이 없이는 관용도 없다. 계몽주의 시대명구가 관용에 대해 명료하게 설명해 준다.     


“나는 너의 말에 반대하지만, 그것을 말할 너의 권리를 나는 죽을 때까지 지키겠다.”

(I disapprove of what you say, but I will defend to the death your right to say it.)    


이 거친 불신과 오만의 시대. 관용을 잃어버린 분열의 시대에 관용의 정신이 다시 살아나기를! 나와 다른 사람의 권리를 인정해 주기를! 그리고 다시 한번 진지하게 나를 돌아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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