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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훈 Nov 14. 2020

겉과 속-도금의 시대

0.1%의 세계, 풍요 속의 빈곤


녹슨 납덩이에 금칠을 한다. 번쩍이는 금빛에 취한 사람들이 납덩이를 차지하기 위해 몰려든다. 흙으로 얽은 건물에 금칠을 한다. 화려한 그 건물의 외관에 놀란 사람들은 그 앞을 지날 때마다 깊은 존경심을 표한다. 하지만 번쩍이는 것이 모두 금은 아니라고 했던가. 금칠이 벗겨지며 드러난 납덩이와 흙집의 모습에 이제 사람들은 경멸과 비난을 보낸다. 오늘의 우리는 추하고 낡은 우리의 속을 애써 화려한 겉모습으로 감추는 이중성의 세계, ‘도금의 시대’(Gilded Age)에 살고 있는지 모른다. ‘도금의 시대’는 미국의 역사에서 19세기 마지막 30년을 가리킨다. 마크 트웨인과 찰스 D. 워너(Charles Dudley Warner)가 쓴 풍자소설의 제목, ‘도금의 시대’((The Gilded Age: A Tale of Today)에서 유래한 말이다. 남북전쟁이 끝나고 급속한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모두가 물욕에 사로잡혀 부정과 부패가 만연하고, 사치와 타락 속에서 겉만 화려했던 위선의 시대. 마크 트웨인이 풍자했던 그 허황된 사회는 1920년대 미국을 그린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에서 부활한다. 스윙 댄스와 재즈의 시대, 계급적 모순과 탐욕, 물질주의와 가치의 상실, 허위와 위선으로 점철된 이 시절의 미국은 정신적인 황폐함 속에 있었다. 그로부터 한 세기를 훨씬 넘긴 지금, 우리는 여전히 도금의 시대에 살고 있는가. 우리의 현실 속에는 많은 환상들이 자리하고 있다. 때론 그 환상에 가려 현실의 삶을 인식하지 못한다. 부의 환상에 가려진 가난, 자비의 얼굴을 한 위선, 도덕을 가장한 방탕함, 믿음에 대한 수많은 배신들. 인류의 역사, 인간의 삶은 이렇듯 겉과 속이 다른 이중성의 연속이었다.        


0.1%의 세계    


미국의 저널리스트 프릴랜드(Chrystia Freeland)는 ‘플루토크라트’(Plutocrats, 금권정치가)라는 제목의 책에서 오늘날 돈과 권력을 독차지한 소수들을 글로벌 슈퍼 리치(Global Super-rich)라 부른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최상층을 구성하는 0.1%. 그들의 세상은 어떠한가. 오늘의 우리는 그들의 성공 스토리에 열광한다. 그리고 그들의 경험을 현대의 성공 테크놀로지로 숭배한다. 빌 게이츠는 경제전문지 포브스(Forbes)가 매년 선정하는 세계 제일의 갑부 자리를 15번 이상 차지했다. 몇 년 전 그의 자산은 약 760억 달러를 넘어 보스턴에 있는 12만 채의 주택 전부를 살 수 있던 정도였다. 아마도 현재 그의 재산은 더욱 불어나 있을 것이다. 그와 같은 슈퍼 리치들에 의한 부의 편중 현상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부자들은 하루가 다르게 축재의 방법을 발전시키고, 우리는 늘 뒤늦게 그들이 이룬 기적에 감동할 뿐이다. 그리고 현실을 잊고 환상의 그늘 속을 헤맨다. 책의 부제처럼 오늘의 시대는 ‘플루토크라트와 그 나머지’로 구성된 것일지 모른다. 그 소수의 부자들에 의해 우리는 또다시 겉과 속이 다른 도금의 세계로 빠져들고 있다.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거대한 부(富)가 보통사람들의 삶과는 무관하게 자신들만의 바다로 흘러들어 간다. 그리고 그 작은 지류에 많은 사람들이 익사를 각오하고 뛰어든다. 그러나 보통사람들의 세계는 슈퍼 리치의 세계와는 다르다. 그들은 그저 그 경제의 신(神)들이 만든 세계의 그림자 속을 배회할 뿐이다. 대기업들은 끊임없이 중소기업의 영역을 침범한다. 거대 자본을 앞세운 다국적 기업들은 매 순간 신기술을 개발하고, 신자유주의가 오히려 시장의 독점을 부르며, 사회의 양극화는 심화된다. 재벌들은 현대의 영주로 군림하고, 다수의 보통사람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한다. 슈퍼 리치들의 황금빛 세계의 환상은 그렇게 그 밑에 숨은 초라한 인간군상의 현실을 가린다.     


풍요 속의 빈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절대적 빈곤으로 생존을 위협당하고 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장 지글러(Jean Zigler) 교수는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에서 전 세계적으로 120억 명이 먹을 수 있는 식량이 생산됨에도 불구하고, 5초마다 한 명의 어린이가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매일 기아로 5만 7000명이 사망하며 세계 71억 인구 중에서 8억 4200만 명이 기아 상태에 있음을 개탄한다. 수많은 인간이 가난과 기아로 허덕이는 오늘의 세계를 풍요로운 세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풍요의 외면에 숨겨진 엄청난 고통과 박탈감을 어찌할 것인가. 금빛 세계는 사막의 신기루처럼 아무리 다가가도 손에 닿지 않는다. 슈퍼 리치로 도금된 세상에서 대부분의 인간들은 납덩이처럼 무겁게 침잠한다. 오늘의 비극적 상황들은 빛나는 물질문명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프랑스의 시인 샤를 페기(Charles Péguy)는 “천재가 아닌 한, 부자는 가난을 상상하지 못한다.”라고 말한다. 황금으로 도금한 사회에서 우리는 부의 환상에 빠져 현대의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 이 도금의 시대에 우리가 인식해야 할 진실은 풍요 속에 고통받고 있는 다수들의 힘들고 외로운 삶이다. 풍요에 가려진 헐벗음이다.     


황금의 유적과 복제품    


인류의 찬란한 문명은 언제나 그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진실은 무엇일까? ‘황금의 시대’라 불리었던 역사의 모든 시기는 겉만 화려한 위선의 시대는 아니었을까. 다수의 희생을 대가로 치렀던 인류문명의 위대한 업적들은 모두 역사의 도금들이 아니었을까. 로마의 콜로세움, 중국의 만리장성, 바빌론의 공중정원, 이집트의 피라미드, 프랑스와 영국을 잇는 도버해협의 해저터널. 고대와 중세, 현대에 이르는 수많은 위대한 유적들은 모두 다수의 고난을 감추고 있는 거짓의 역사일지도 모른다.    


키치(Kitch)라는 문화현상이 있다. 가짜 혹은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난 사이비라는 의미의 미술용어이다. 19세기에 생겨난 이 용어는 부르주아 계급의 탄생, 상업주의 예술과 궤를 같이한다. 키치는 거장들의 예술작품을 복제하여 겉만 비슷하게 만든 저속한 예술품, 저속한 문화예술을 지칭한다. 고급의 문화, 수준 높은 예술의 안목을 갖지 못한 채, 그 아류를 생산하여 문화적 허영을 만족시키려는 대중의 이데올로기. 그런 의미에서 키치는 중산층의 대두와 더불어 시작된 그들만의 이데올로기, 자유주의와 닮아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키치의 속성을 저급한 것으로 치부할 수만은 없다. 오히려 진부하고, 저열한 속내를 금빛으로 도금하는 것보다는 더 솔직하고 진솔하다. 자신의 수준에서 예술을 즐기고 그것을 향유하려는 의식의 발로이기 때문이다. 키치는 스스로의 저급함을 드러낼 때 더욱 순수한 나름의 가치를 지닌다. 도대체 그 위의 고급 예술, 고급문화는 무엇을 기준으로 존재하는가. 이런 점에서 키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성을 공유한다. 중심과 주변, 고급과 저급의 구분이 없는 세계, 그래서 조악한 것으로 보이더라도 금색을 칠한 가짜보다는 더 인간적이다.       


내면에의 성찰    


“판매 중; 아기 신발. 한 번도 신은 적 없음”(For Sale: Baby Shoes. Never Worn.) 세계에서 가장 짧은 소설. 소설이 아니라 시라고 해도 파격적이다. 몇 개의 단어로 심금을 울려보라는 친구와의 내기를 위해 썼다는 헤밍웨이의 글이다. 여섯 단어로 헤밍웨이는 가슴을 적시는 슬픔을 묘사했다. 왜 그들은 아이의 신발을 팔려고 내놨을까? 아이는 왜 한 번도 신발을 신어보지 못한 것일까? 아이를 잃은 가난한 부부가 사랑하는 아이의 한 번도 신어보지 못한 신발을 팔려고 내놓았을 때의 슬픔과 번민을 무엇으로 위로할 수 있을까? 이 척박한 우리의 삶을 어찌할 것인가. 물질적 풍요의 금빛 세계에 가려진 무수한 슬픔들, 현대도 이러한 시대의 이중성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다. 도금의 세계는 그렇게 계속되고 있다.    


놀라운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세상은 더욱 편리해지고 풍요로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화려한 번영 뒤에 아직도 다수의 빈곤과 기아와 질병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오늘날 새로운 도금의 시대에 우리는 그 금빛 환상으로 가려진 우리의 현실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찬란한 과학기술의 세상,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고, 모든 것을 다 이룰 수 있을 것 같은 저 놀라운 사이버의 환상에 빠져 거짓된 일상에 만족하고, 자신들의 내면을 돌아보지 못하는 것은 오늘의 우리가 경계해야 할 현대의 모순이고 이중성이다. 도금의 시대에 우리가 할 일은 0.1%의 소수를 숭배하고 그들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올바르게 인정하고, 환상에 젖어있는 이 세상에 현실감을 부여하는 일이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은 황금의 껍질을 벗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당당히 살아갈 납덩이같은 다수임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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