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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훈 Dec 07. 2020

페르소나, 가면의 안과 밖

가면을 쓰고 벌이는 가면무도회

인간은 누구나 가면을 쓰고 산다. 때로는 감추기 위해, 때로는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다양한 역할을 부여받은 채 삶을 살아간다. 부모이기도 하고 자식이기도 하며, 누군가의 상사이면서 다른 사람의 부하이기도 하다. 리더로서 위엄을 갖추다가도 어린 시절의 친구를 만나면 속없이 말하고 철없이 행동한다. 또한 직업에 따라 회사원, 변호사, 교사, 엔지니어, 청소부 등 자신만의 역할을 맡는다. 그렇게 타인에게 자신의 외적인 모습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반면 우리는 원래의 자아, 내면에 숨겨진 본능적인 자신의 모습과 감정을 숨기기 위해 가면을 쓰기도 한다. 슬픔 속에서도 웃음을 터뜨리고, 좌절 속에서도 의연한 척 하며, 외로움 속에서도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그렇게 우리는 여러 개의 가면을 준비해 놓고 있다.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자신의 가면을 바꿔 쓰는 것이 인간의 모습이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삶은 순간마다 달라지는 가면을 쓰고 벌이는 가장무도회와 같은 것이다.     


페르소나(Persona)    


고대 그리스의 배우들은 무대 위에서 가면을 썼다. 거대한 야외극장에서 그들은 멀리 떨어진 관객들에게 그들의 모습이나 표정을 뚜렷이 드러낼 수 없었다. 그래서 굽 높은 구두를 신고 화려하게 치장된 의상을 입었으며 머리에는 긴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신분과 감정을 표현하는 가면을 쓰고 있었다. 등장인물들이 쓴 가면을 보고 관객들은 그들의 성별을 구분하고, 그들의 지위와 그들의 감정을 알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 배우들의 가면은 숨기기 위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역할과 느낌을 과장되게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다. 페르소나! 그것은 그들이 썼던 가면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스위스의 정신의학자 카를 융(Carl Gustav Jung)은 이 용어를 겉으로 드러나는 우리의 인격, 즉 ‘외적 인격’을 가리키는 심리학적 용어로 사용한다. 그것은 사회적 실재로서의 우리의 모습을 나타낸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야말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반면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자아는 개인적 실체로서 남에게 쉽사리 내보이지 못할 우리만의 모습이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가면이 필요할지 모른다. 우리는 페르소나로서 세상을 살아간다. 그리고 그 가면이 우리의 모습을 규정한다. 융의 표현을 빌자면 “인간은 천 개의 페르소나(가면)를 지니고 있어서 상황에 따라 적절한 페르소나를 쓰고 관계를 이루어 간다.” 페르소나를 통해 개인은 생활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표현하고, 주변 세계와 상호 관계를 성립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내면적 심리를 조절함으로써 갈등을 완화한다. 그러나 페르소나가 자신의 내면과 충돌을 일으킬 때, 우리는 스스로의 정체성에 혼란을 일으켜 불안과 좌절의 감정에 빠지기도 한다. 자신이 쓴 가면을 스스로가 인정하지 못할 때, 그리고 그 가면의 모습이 타인과의 관계에서 갈등을 일으킬 때, 우리는 자신의 외면에 대한 불확실성에 사로 잡혀 스스로를 경멸하게 되는 것이다.    


미국의 극작가 유진 오닐(Eugene O’Neill)의 희곡 ‘털 복숭이 원숭이’(Hairy Ape)의 주인공 얀크는 유람선의 화부(火夫)였다. 갑판 위에서 벌어지는 화려한 파티와는 무관하게 그는 배의 기관실에서 불에 석탄을 던져 넣고 있었다. 그렇게 화부의 가면을 쓴 채 검은 석탄가루에 묻혀있던 그는 어느 날 호기심에 이끌려 배의 밑바닥까지 내려온 아름다운 소녀를 발견한다. 그리고 반가운 마음에 다가서는 순간, 그 소녀는 얀크의 흉측한 몰골에 충격을 받고 정신을 잃는다. 그렇게 얀크는 처음으로 자신의 가면, 자신의 페르소나를 인식한다. 그리고 깊은 회의와 절망감 속에서 배를 떠난다. 육지에 올라온 그는 화려한 뉴욕의 거리를 걷는다. 그의 옆을 지나가는 무심한 얼굴들, 그들은 모두 백색의 가면을 쓰고 있었다. 화부의 가면을 벗어던진 그만이 맨 얼굴로 거리를 배회한다. 그 어디로도 갈 곳을 찾지 못했던 그는 동물원으로 향한다. 그리고 우리 속 오랑우탄을 바라보다가 문득 그 털 복숭이 유인원에게 강한 동질성을 느낀다. 하지만 철장을 넘어 우리 안으로 들어간 그는 거대한 오랑우탄에 의해 무참히 짓밟힌다.     

유진 오닐, 털복숭이 원숭이 중의 얀크

얀크의 페르소나는 무엇인가? 그가 화부로서의 가면을 벗는 순간, 그의 모습은 다른 이들의 눈에 어떤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일까? 뉴욕의 거리에서 마주친 그 수많은 백색 가면의 행렬은 맨 얼굴로 걸어가는 그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의 눈에 그는 보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가면을 쓴다. 똑같은 가면을 쓰고 그 행렬의 끝을 따라간다. 그렇게 우리는 같은 가면을 쓰고 서로를 바라본다. 그리고 가끔씩 그 상투적인 가면을 벗어던지고 싶은 강한 욕망을 느낀다. 하지만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욕망일 뿐이다. 가면을 통해서라도 타인의 눈에 보이고 싶고, 동질감을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 얀크의 비극은 자신에게 운명처럼 부여되었던 가면을 벗어던졌지만, 다른 사람들과 교감할 자신의 또 다른 가면을 찾아내지 못한 것이었다. 우리 속에 갇힌 짐승에게 마저도 거부당한 그의 정체성은 자신의 내면에 만족하지 못하는 우리의 내면을 상징한다. 그래서 우리의 페르소나는 언제나 슬프고 고통스러운 표정일지 모른다.     


가면, 감춰진 욕망과 불안     


중세 이태리 베네치아에는 가면을 쓰는 풍습이 있었다. 시민들이 금빛의 화려한 가면을 쓰고 귀족의 흉내를 내는 가면놀이를 즐겼던 것이다. 그들은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동경과 욕망을 가면 뒤에서 누려보려 했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었다. 본래의 모습을 가리고 자신을 더 크고, 화려하고, 장엄하게 보이고자 하는 욕망, 그것은 인간이 지니는 가장 원초적인 속성일지 모른다. 그래서 가면은 곧 우리의 내면의 반영이기도 하다. 외적으로 드러내는 자신의 모습을 거짓으로라도 변화시키고자 하는 욕망, 그래서 인간은 늘 가면으로 자신을 장식한다. 그렇게 이중적인 것이 인간의 모습이다. 러시아 태생의 프랑스 작가 아다모프의 희곡 ‘타란느 교수’(Professor Taranne)에 등장하는 교수는 늘 훌륭한 강의로 학생들의 존경을 받는다. 그랬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말을 잃은 채 강의실에서 아무 의미 없는 소리만을 웅얼거린다. 그의 모든 학식, 강의, 업적이 그렇게 사라져버린다. 그에게서 교수라는 가면이 벗겨진 날, 그는 지금까지의 자신을 송두리째 잃어버린다. 그렇게 우리는 자신의 외면적 모습을 확신하지 못한다. 지금의 내가 진정한 나의 모습일까? 심지어 성공한 사람들조차도 자신의 모습에 불안을 느낀다. 자신의 가면이 언제 발가벗겨질지 모른다는 초조함 때문에 그들은 외면의 자아에 대한 신뢰를 상실한다. 미국의 심리학자 폴린 클랜스(Pauline Clance)는 이러한 심리를 ‘가면 현상’(Impostor Phenomenon)이라 부른다. ‘Impostor’라는 영어단어는 ‘다른 사람을 사칭하는 사기꾼’이라는 뜻이다. 즉 자신의 참 모습을 숨긴 ‘거짓 가면’이란 의미이다. 스스로를 사기꾼이라 느끼는 감정. 자신의 내면과는 너무도 다른 외면의 자아에 대한 불신, 그것이 ‘가면 현상’인 것이다. 클랜스에 따르면 미국의 상류층 인사들 가운데 70% 이상이 실제로 이러한 현상을 겪고 있다고 한다. 실존하는 자신의 모습에 대한 의심, 그리고 가면 뒤에 숨어있는 마음속 자아와의 괴리, 그것만으로도 우리의 삶은 늘 흔들린다. 외면과 내면의 경계에 존재하는 가면이 우리를 뒤흔든다. 그러한 욕망과 불안의 혼재, 그것이 우리가 쓰고 있는 가면의 진정한 모습일지 모른다.     

우리의 내면은 어떤가? 가면으로 드러난 겉과 다른 우리의 속은 어떤 모습일까? 그것은 영원히 드러나지 않을 수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가면을 쓴 우리의 외면이 곧 우리의 내면이기도 하다. 감정의 가면, 욕망의 가면, 진실과 거짓의 가면 모두가 우리의 진정한 자아이며 페르소나이다. 우리의 외적 인격은 내면의 소리를 감추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우리의 내면을 드러낸다. 그리스 연극의 가면은 분노, 슬픔, 환희, 욕망 등 우리의 내면을 표현하고 있다. 그렇듯 외적으로 표출되는 우리의 감정과 욕망이 우리의 내면을 보여준다. 이러한 의미에서 페르소나는 우리의 내면과 외면을 함께 의미한다. 독일 소설가 헤르만 헤세의 어른들을 위한 동화 ‘내면과 외면’에서는 그 두 가지, 즉 겉과 속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님을 얘기하고 있다. “자네는 외면이 내면으로 될 수 있다는 것을 체험했네... 자네는 오늘까지 마음의 노예에 불과했었지. 이제 그 지배자가 되는 법을 배우게. 이것이 바로 마술이네.”    


외면은 내면을 지배한다. 외면이 우리가 쓰는 가면에 의해 규정된다면 그 가면은 우리의 내면을 지배한다. 우리가 어떤 페르소나를 선택하는가가 중요해지는 이유이다. 우리가 쓰는 가면은 우리가 그려내는 우리의 자화상이다. 그리고 그 그림 속에서 우리의 마음을 본다. 그것은 아침의 햇살에 빛나는 이슬 속에서 우주와 신의 섭리를 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우리는 불안에서 벗어나야 한다. 스스로가 만들어온 자신의 모습을, 자신이 선택한 가면에 대해 신뢰를 잃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우리의 내면이고 우리의 삶인 한, 우리의 가면은 솔직하고 행복한 표정을 가져야 한다. 우리의 페르소나는 결국 우리 자신이 만드는 것임을 기억하자. 가면을 벗고 맨 얼굴로 세상을 만나는 순간, 맹목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가면을 쫓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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