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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훈 Dec 13. 2020

우연과 필연

항상 낚시 바늘을 던져두라. 기대하지 않은 곳에 물고기가 있을 것이다

우리의 삶은 우연에 의해 좌우되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겪게 되는 모든 것들은 미리 정해진 대로 이루어지는 필연인 것일까? 우연과 필연의 차이는 결국 인과관계에 있다. 원인 없이 이루어지는 결과는 우연이고, 원인에 의해 초래된 결과는 필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운 좋게 복첨에 당첨되는 것은 우연이고, 방탕과 게으름으로 몰락하는 인생은 필연이다. 결국 우리의 삶은 우연과 필연이 끊임없이 얽혀 만들어지는 것이다. 우연만으로 이루어진 삶이 없는 것처럼, 필연적으로 결정된 삶도 없기 때문이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면, 세상의 모습은 바뀌었을 것이다.” 파스칼의 말이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면’이라는 가정은 우연에 기댄 논리이지만, 그것이 하나의 원인으로 작동한다면, ‘세상의 모습은 바뀌었을 것이다.’라는 결론은 필연이다. 적어도 파스칼에게 있어서는 말이다. 따라서 하나의 논리도 결국은 우연과 필연의 상호 맥락 속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우연이 필연을 낳고, 또다시 그 필연의 결과는 우연에 의해 변화된다. 우리의 삶은 우연과 필연으로 이루어진 뫼비우스의 띠와도 같은 것이다.     


우연, 그 필연의 시작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우연과 필연의 결과이다.” 기원전 5세기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데모크리토스의 말이다. 이에서 힌트를 얻었다는 프랑스의 생화학자 자크 모노(Jacques Lucien Monod, 1910~1976)의 책 ‘우연과 필연’에서는 생명의 기원을 우연에 의한 것이라 말한다. 그는 생명체를 이루는 기본구조 속에서는 “오직 맹목적인 우연에 의해 아미노산 잔기(殘基)들이 서로 짝지어지는 놀이 이외에는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그 우연의 축적에 의해 이루어진 생명이 하나의 질서를 이루는 것은 결국 필연이다. 즉 미시적인 상황 속의 우연들이 합쳐져 결국 거시적인 차원의 필연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모두 그러한 것 같다. 우리의 탄생 자체도 부모의 정자와 난자가 만나는 우연에서 비롯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결국 한 개체로서의 삶이 필연적으로 이어지고 생명은 끝없이 연속되고 있다.     


사실 모든 것의 시작은 우연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플레밍(Alexander Fleming, 1881~1955)이 페니실린을 발견한 것은 우연이었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를 연구하던 그는 우연히 배양기에 발생한 푸른곰팡이 주위가 무균상태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이 우연을 노력을 통해 필연으로 바꾸어 놓는다. 푸른곰팡이의 배양물을 800배로 희석해도 포도상 구균의 증식을 억제할 수 있음을 알아내고 이 물질을 페니실린이라 명명하였던 것이다. 우연은 그 자체만으로도 변화를 초래하지만, 이후의 과정을 통해 필연의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2002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일본의 다나카 고이치(田中耕一)는 학자 출신의 평범한 연구원일 뿐이었다. 그가 노벨상 수상자로 발표되었을 때, 일본에서 조차 그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다나카는 실험 도중 용기를 착각해 코발트와 글리세린을 섞는 실수를 범한다. 그러나 이 실수를 통해 레이저에 의해 파괴되는 단백질을 보호하는 완충제를 만들어낸다. 우연히 벌어진 실수의 결과는 그의 노력에 의해 새로운 발견이라는 필연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었다.     

‘나비효과’(Butterfly Effect)라는 표현은 미국의 기상학자 에드워드 노턴 로렌즈(Edward Norton Lorenz, 1917~2008)의 강연제목 ‘예측 가능성-브라질에서의 한 나비의 날갯짓이 텍사스에 돌풍을 일으킬 수도 있는가’에서 유래한다. 사소한 사건 하나가 나중에 커다란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의미로 쓰이지만, 원래 혼돈이론(Chaos Theory)에서는 시공간을 가로질러 하나의 원인이 다른 결과를 초래하는 과정을 과학적으로 예측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작은 우연들, 작은 조짐들은 이후에 벌어질 운명 같은 필연의 전주일지도 모른다. 나비의 날갯짓이 거대한 태풍의 전조인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그것이 어떤 예기치 못할 거대한 필연의 결과로 이어질 개연성은 결코 간과할 수 없다.     


역사의 우연 그리고 필연     


역사는 수많은 우연 속에서 이어져 왔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져 내린 것은 역사의 필연이었다. 공산권의 종주국이었던 소련의 몰락에 따라 유럽의 공산주의는 해체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서독과 동독이 통일을 이루던 순간, 동서 베를린을 갈라놓고 있던 베를린 장벽은 더 이상 존재의 의미를 상실하고 있었다. 그러나 역사의 우연은 아주 사소한 일에서 시작되었다. 기자들이 동독의 공산당 대변인에게 언제부터 동독인들이 서독을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느냐고 질문하자 “지금 당장”이라고 대답했다. 그 순간 동베를린의 주민들은 망치와 도끼를 들고 그 분단의 장벽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정치적 상징을 넘어 실제의 장벽을 부수기 시작했다. 물론 베를린 장벽은 무너질 수밖에 없는 역사의 필연 앞에 서 있었다. 그러나 한 관리의 성급한 답변이 수십 년 간 베를린의 동과 서를 가르고, 독일의 분단을 상징했던 장벽을 일순간 돌무덤으로 바꾸어놓았던 것이다. 그래서 역사는 흥미로운 것인지 모른다. 작은 우연이 그날 그 극적인 장벽의 붕괴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만일 역사 속의 모든 사건들이 분명한 이유 때문에 이루어진다면 역사는 얼마나 따분할 것인가. 프랑스혁명 때, 루이 16세는 오스트리아로 망명을 시도하다가 우연히 시민들에게 붙들리고 이후에 전개된 내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의 왕비와 함께 단두대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혁명 뒤의 열정에 이어 새로운 권력 나폴레옹이 등장하는 것은 우연에 의해 시작되고 필연에 의해 마무리되는 역사의 한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역사는 계속되는가? 우연과 필연의 변증법으로 역사는 계속될 수 있는가? 역사의 필연은 결국 어디로 귀결될 것인가? 미국의 정치학자 F. 후쿠야마(Francis Yoshihiro Fukuyama, 1952~ )는 1989년 ‘역사의 종언’(The End of History)이라는 논문에서 1990년대 소련의 몰락과 더불어 공산주의의 종식과 그에 따른 자유민주주의의 최종적인 승리를 예언하면서 역사의 종언을 선언하였다. 물론 그가 얘기하고 있는 역사의 종언은 인류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역사의 최종적인 귀결을 뜻하는 것이었다. 한편 미국의 역사학자이자 예일대학의 교수인 폴 케네디(Paul Kennedy, 1945~ )는 1988년에 출간된 그의 저서 ‘강대국의 흥망’(The Rise and Fall of the Great Powers)에서 21세기는 미국, 서유럽이 쇠퇴하고 중국, 일본 등 아시아의 강국들이 부상할 것을 예언하였다. 놀라운 통찰력이었다. 그들의 예언은 30여 년이 지난 오늘, 많은 의심과 비판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예언적이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역사의 필연이 마치 한 편의 드라마처럼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온 역사의 우연과 필연은 그래서 오늘의 삶을 결정한다. 그리고 다가올 미래의 삶에 대한 새로운 기대로 이끌어가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미리 정해진 대로 흘러가는 것은 아닐까?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인간의 운명은 이미 결정된 것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당신은 운명론자이다. 운명은 결코 피할 수 없는 필연인 탓이다. 하지만 우리의 삶이 미리 규정되어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삶의 목적을 무엇으로 세우고, 방향을 어디로 정해야 하는가. 태어남은 우연이지만 죽음은 필연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삶의 주인은 우리 자신이다. 사는 동안 많은 우연에 부딪히겠지만 죽음이라는 필연에 도달하기 전, 우리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정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는 이렇게 말한다. “우연은 늘 강력하다. 항상 낚시 바늘을 던져두라. 전혀 기대하지 않은 곳에 물고기가 있을 것이다.” 우연을 필연으로 만드는 지혜야말로 인생의 지혜가 아닐 수 없다. 운명에는 우연이 없다. 운명은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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